공주에서 1971년 백제의 무령왕릉이 발굴된데 이어 73년 경주에서
천마총이 발굴돼 천마도 금관등 모두 11,200여점의 유물이 쏟아져 나오자
전국은 온통 감격과 흥분으로 휩싸였다.

당시 전문기술문제등으로 반대하는 고고학자들을 누르고 고분발굴을
강요하다 싶이했던 박정희대통령은 청와대에서 이 유물을 처음 대했다.

그때 박대통령이 소년처럼 신기해 하면서 금제수저와 팔찌를 휘었다
폈다 할때마다 가슴이 철렁철렁 내려앉았다는 김원룡교수 생전의 회고담은
유물에 대한 일반인과 전문가의 애착의 정도가 얼마나 다른가를 보여주는
이야기로 남아있다.

김교수는 후일 "정년퇴임기념 논문집"에서 "고고학 발굴이란 누가 언제
하더라도 유적이 가지고 있는 문화 역사정보의 일부만을 얻어내고
그거나마 흔히 잘못된 판단을 진실처럼 퍼뜨리는 일종의 유적파괴행위"
라고 썼다.

그리고 천마총 발굴의 득실은 아직 뭐라고 자신있는 평가를 내리기
어려운 실정이라고 털어 놓으면서 100년뒤에 발굴했더라면 진보된 발굴,
연구기술로 지금보다 적어도 배는 정보를 얻어냈을 것이라는 점만은
확실하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김교수의 견해와는 전혀 다르게 한국의 70~80년대는 보물찾기라도
벌이듯 발굴이 붐을 이뤘던 시대였다.

뒷얘기를 들어보면 그동안 발굴기법미숙으로 저지른 실수도 숱하다.

안압지 바닥에서 출토된 일부 목간의 글씨가 산화해 사라져 버린 것은
대표적 사례의 하나다.

한국 최초의 고고학 발굴이라고 부를만한 것으로는 1995년 국립박물관의
감은사지발굴을 꼽을 수 있다.

이 발굴에서 김당지가 다듬은 돌로 건물아래 공간을 만든 특수구조임이
밝혀졌다.

이때 함께 해체보수된 서탑의 3층 옥신석에서는 금동사리함이 발견됐다.

그로부터 36년만인 최근 보수를 위해 해체된 동탑같은 장소에서 또
하나의 금동사리함이 발견돼 감은사지가 다시한번 세인의 관심을 끌고
있다.

거대한 쌍탑에 각기 사리함을 봉안한 것은 중국 인도 일본에는 유례가
없다는 학자들의 이야기도 의미깊다.

삼국통일을 이룬 신라 문무왕의 해중릉과 그가 용이되어 드나들었다는
감은사 김당지의 특수구조,두 기의 탑과 두개의 사리함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일까.

36년동안 두차례나 발굴을 하놓고도 "삼국 사"의 기록을 확인하는데
그친 관련 학계의 분발이 아쉽다.

유물은 모두 꺼내고 동물의 발제처럼 껍데기만 덩그라니 남은 감은사의
신비는 "만파식적"이야기처럼 계속 전설로만 남을 것인지 궁금하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4월 2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