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저 여자가 누군가.

대관원에 들어와 있다면 각 처소에 딸린 시녀들 중 하나가 아니겠는가.

하지만 아무리 보아도 시녀 같지는 않았다.

호리호리한 몸매에 딱 어울리게 입은 옷차림도 그렇고, 궂은 일 같은
것은 해본 적이 없는 듯한 말쑥한 얼굴을 보아도 그러하였다.

보옥이 가만히 뜯어보니 여자의 이목구비가 여간 또렷하지 않은게
대옥이나 보채의 미모에 못지 않았다.

저런 미모라면? 그제야 보옥이 그 여자의 신분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대관원 통후가문쪽에 있는 이향원에서 늘 연극 연습을 하는 열두 명의
여배우들 중 하나일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보옥이 연극을 구경할 때 본 얼굴 같기도 했다.

그런데 생(남자 주인공)역을 맡았는지, 단(여자 주인공)역을 맡았는지,
아니면 정(악인)역이나 축(익살꾼)역을 맡았는지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 여자가 장자를 쓰고 또 쓰고 있는 이유에 대해 추측을 해보다가
보옥이 손으로 무릎을 소리나지 않게 살짝 쳤다.

바로 그 여자는 가장의 이름을 쓰고 있는 것이 분명하였다.

가장은 소주에 가서 열두 명의 여배우를 사 가지고 와 이향원에서
연습하도록 하면서 지금도 그 배우들을 관리하고 있지 않은가.

그 여자가 가장을 연모하는 마음을 그런 식으로 스스로 달래고
있는지도 몰랐다.

슬피 흐느끼는 것으로 보아서는 어쩌면 가장이 그 여자를 겁탈
했을 수도 있었다.

가장은 능히 그러고도 남을 위인이 아닌가.

만약 가장이 그랬다면....

보옥은 그 여자가 마치 자기 여자라도 되는 양 가장에 대한 분노가
끓어올랐다.

여자는 계속 애간장이 녹는 듯이 흐느끼면서 비녀로 장자를 자꾸만
쓰고 있었다.

머리가 풀어진 것으로 보아 그 비녀는 여자가 머리에 끼고 있던
비녀임에 틀림 없었다.

아, 저렇게 가냘픈 여자의 작은 가슴 속에 저토록 큰 고통과 슬픔이
담겨 있단 말인가.

보옥은 마음이 아파 견딜 수 없었다.

그런데 하늘도 그 여자의 흐느낌에 응하는 듯 갑자기 구름이 몰려오더니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여자의 엷은 옷이 흠뻑 젖어 몸에 착 달라붙었다.

어깨와 젖가슴, 엉덩이의 선이 그대로 드러났다.

미인도에 빼어난 재주를 지닌 화가조차도 저런 아름다운 그림을
그릴 수는 없을 것이었다.

그 아름다움은 욕정적인 차원을 뛰어넘은 처절한 아름다움이었다.

보옥은 자기도 젖고 있는 줄은 모르고 그 여자가 안쓰러워 그만 자기도
모르게 고함을 질렀다.

"그러고 있으면 비에 다 젖어 감기에 걸려!"


(한국경제신문 1996년 4월 2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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