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옥이 대옥에게 대문을 열어주지 않은 시녀의 이름을 대어보라고 하며
씩씩거렸지만, 대옥은 시녀들이 대문 안 쪽에 있었기 때문에 이름은 잘
모르겠다고 얼버무렸다.

대옥이 청문이 그랬다고 고자질을 하면 청문이 얼마나 치도곤을 당할지
모를 일이었다.

아무튼 대옥은 보옥의 표정으로 보아 보옥이 대문을 열어주지 말라고
시키지는 않았다는 것을 믿을 수 있었으므로 일단 오해는 풀린 셈이었다.

"근데 보채 언니랑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재미있게 했어요? 바깥에서
들으니 웃음소리들이 명랑하던데"

대옥이 슬쩍 미소를 떠올리며 여유 있는 표정으로 물었다.

"아, 별거 아니었어. 내가 보채의 오빠 설반의 초대를 받아 대접을
받았거든.

생일 선물로 진귀한 음식들이 들어왔다면서 같이 먹자고 초대를 한 거지.

아버지가 나를 부르는 것처럼 속여서 말이지.

그런 이야기들을 보채 누이랑 나누었을 뿐이야"

"그러니까 아버지가 부르신 것이 아니었군요.

나도 그것이 궁금해서 이홍원으로 찾아갔던 거예요"

대옥의 눈빛이 포근해지는 것을 느끼며 보옥은 다시금 기분이 좋아졌다.

보옥은 스스로 생각해도 자기 기분은 대옥의 기분에 따라 좌우되는
것만 같았다.

대옥 편에서는 자신의 기분이 보옥의 태도에 따라 좌우된다고 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이 같은 기분 속에 아련한 행복감에 젖고 있을 때 시녀가
달려와서 저녁 식사준비가 다 되었다고 아뢰었다.

두 사람이 시녀를 따라 왕부인에게로 가니 왕부인이 대옥에게 약을
잘 먹고 있느냐, 몸은 좀 나아졌느냐 하고 물었다.

"포의원이 지어준 약을 먹어도 별 차도가 없어요.

그러니까 할머님은 왕의원이 지어준 약을 가지고 와서 또 먹으라고
하세요"

"글쎄, 이 약 저 약 함부로 먹으면 병이 더 도지지나 않을까 모르겠네"

왕부인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염려스런 표정을 지었다.

"어머님, 대옥 누이 병은 인삼양영환이니 팔진익모환이니 천왕보심단
같은 것으로는 나을 수가 없어요.

저에게 돈 삼백육십냥만 주시면 대옥 누이 병에 꼭 맞는 약을 지어
오겠어요"

보옥이 진지하게 이야기하였으나 왕부인은 농담으로 알아듣는
모양이었다.

"의원도 아니면서 무슨 약을 짓겠다는 거야? 그리고 약값이 왜 그리
비싸?"

"이 약은 약재부터 특별한 것들이거든요"

보옥이 약재의 이름들을 죽 열거하기 시작했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4월 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