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옥은 잠시 혼절했다가 깨어나 다시금 대옥이 있는 꽃무덤 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노래소리는 들리지 않고 슬피 흐느끼는 소리만
들렸다.

보옥은 자기가 대옥의 마음을 상하게 하여 저토록 울게 만든것 같아
심장이 저며지는 듯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노래 가사 내용이 보옥의 마음을 한없이 무겁게 하고
비애에 젖도록 하였다.

건강하고 아름다운 청춘이 지나가고 고운 얼굴이 주름살에 묻혀가는
것을 보면 인생에도 봄에 핀 꽃들을 떠나보내는 화신제 같은 제사가
필요한지도 몰랐다.

하지만 대옥은 아직은 자기 인생에 있어 그런 화신제를 드릴 시기가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도 왜 저리 깊은 허무를 노래하는 것일까.

꽃은 내년에 피면 또 볼 수 있으련만 사람은 가면 억겁 지나도 다시
볼 수 없네 고운 얼굴 어여쁜 자태도 하루아침 바람에 날리고 나면
찾을 길 없네 보옥은 쓰러지기 전에 들었던 가사를 떠올리며 대옥을
따라 자기도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러자 대옥이 울음을 그치고 보옥 있는 데로 와서 놀란 얼굴로 쳐다
보았다.

"아니, 여기서 왜 울고 있어요?"

대옥은 마치 자기는 전혀 울지 않은 듯 시치미를 떼고 물었다.

보옥은 이왕 울기 시작한 김에 대옥의 동정을 더 사보자 하는 심정으로
조금 더 큰 소리를 내어 울었다.

이만큼 울었으면 대옥의 마음도 풀어졌겠지 하고 보옥이 눈을 들어
보니 웬걸 대옥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아이쿠, 또 어디로 간 거야. 보옥이 급히 옷을 털며 일어나 대옥을
찾아나섰다.

소산 한 모퉁이를 돌아가니 저 앞쪽에 대옥이 타박타박 걸어가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보옥이 걸음을 빨리 하여 다가가 소리쳤다.

"대옥 누이! 왜 자꾸 나를 피하는 거야? 어제 원앙금침 어쩌고 한 것
내가 이미 사과를 했는데 왜 이러는 거야?"

대옥이 걸음을 멈추고 홱 돌아서서 보옥을 뚫어질듯 노려보았다.

대옥의 두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독기 같은 것이 보옥이 보기에는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었다.

"원앙금침 어쩌고 한 말 때문에 이러는 게 아니에요.

어젯밤에 보채 언니는 이홍원에 들어오도록 하고선 내가 대문을
두드리자 왜 열어주지도 않았어요?"

"어젯밤에 대옥 누이가 이홍원으로 왔다구? 난 금시초문인데"

"시녀들이 그러던데요.

보옥 도련님이 아무도 들어오지 말라고 했다고"

"어, 난 그런 말 한적 없어.시녀들 자기들이 귀찮으니까 나를 팔아
지어낸 말일 거야. 이년들을 그냥"


(한국경제신문 1996년 4월 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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