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옥이 대문을 두드리는 데도 시년들이 열어주기 않은 것을 앞서
들어간 보채 때문이었다.

시녀들로서는 밤중에 찾아오는 손님이 반가울 리가 없는데 보채는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시녀들을 무시하는 태도로 대문을 들어서
보옥의 방으로 간 것이었다.

그래서 그 다음에 오게 된 대옥이 시녀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한
셈이었다.

그러나 대옥은 보옥이 정말 시녀들에게 그런 지시를 내린 줄 알고
대문 앞에 서서 눈물만 계속 흘리고 있었다.

그런다가 소상관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담 모퉁이 꽃나무 밑에
이르러서도 또 한동안 흐느껴 울었다.

보옥이 어떤 때는 보채에게 마음을 두고 있는 듯이 여겨지곤 하였다.

대옥은 아버지 어머니도 없는 고아인 자기를 보옥이 그냥 잠시 즐기는
노리개감 정도로 취급하고 있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집안 배경이 아직까지는 든든한 보채에 비해면 대옥 자기는 초라해
보이기만 하였다.

보옥을 비롯한 집안 사람들로 보옥의 정식 아내감으로서 보채쪽에
점수를 더 주고 있는지도 몰랐다.

대옥은 보옥이 보채와 혼인을 하고 자기는 쓸쓸히 홀로 남게 되는
상황을 떠올리며 부르를 몸을 떨었다.

그런 상황이 다가온다면 살이갈 엄두가 나지 않을 것 같았다.

대옥이 더욱 서럽게 흐느끼자 꽃나무 가지에 앉아 잠을 청하려던
새들이 애절한 대옥의 울음소리에 안 그래도 작은 심장이 그만 터져
버릴것 같아 푸르락 떼를 지어 다른 나무 가지로 옮겨갔다.

얼마 후 이홍원 대문이 삐이꺽, 하며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옥이 눈물 어린 눈으로 대문 쪽을 바라보며 보채가 먼저 나오고
뒤따라 보옥과 시녀들이 우르르 따라나왔다.

보옥과 시녀들이 보채를 정성스레 배웅하는 목소리들이 대옥의 귓전을
파고들었다.

대옥은 심장이 송곳에라도 찔린 것처럼 가슴을 움켜 쥐고 소상관으로
마구 달려가 방으로 들어가서는 침상에 쓰러져 하염없는 눈물로 베개와
요를 적셨다.

대옥의 시녀들은 요즘음 대옥이 수심에 잠겨 눈물 짓는 일들이 종종
있으므로 또 그러는가 보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는 조금 대옥을
지켜보다가 각자 가지 방으로 흩어져 잠 잘 준비를 하였다.

혼자 남게 된 대옥은 침대 위에서 두 팔로 무릎을 싸안더니 밤이
깊도록 그 자세로 그대로 그림처럼 앉아 있었다.

이제 눈물마져 마르고 한숨마저 소진되어 창백한 얼굴에는 달빛과도
같은 푸른 빛이 감돌았다.

어떻게 보면 그 얼굴의 푸른 빛이 죽음의 빛깔 같기도 하였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3월 3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