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그룹 창업주인 고 이병철회장가의 기업들이 유통업에 잇따라
참여하면서도 서로간의 경쟁을 피하기위해 사업분야를 조정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있다.

똑같은 유통분야에 뛰어들어 이전투구를 벌이기 보다는 서로의 영역을
존중하면서 각자 다른 분야를 개척하겠다는 의지가 삼성가 기업들의 최근
행보에서 엿보이고있다.

고이병철회장의 장녀인 인희씨가 대주주인 한솔그룹은 유통업의
첫 사업으로 서울 소피텔앰버서더호텔에 면세점을 내기로 거의 결정했다가
막판에 취소했다.

바로 맞은편에 있는 호텔신라의 면세점과 경쟁하는 모습을 보이기가
싫다는게 이유였다.

이인희고문이 최종결정단계에서 "비토권"을 행사했다는게 회사관계자들의
얘기다.

한솔그룹은 제지배송창고등 전국에 산재해있는 부지를 유통사업에
활용하기 위해 계열사인 한솔유통에 유통사업팀을 올해초 만들었다.

이 팀은 한솔그룹이 유통사업에 경험이 없는데다 전문인력도 부족해
상대적으로 손쉬운 면세점사업부터 시작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 첫 작업이 소피텔엠버서더 호텔내 면세점 설치였다.

그러나 "호텔신라"라는 복병 때문에 이같은 계획은 취소돼야 했다.

오너의 의중을 알아챈 유통사업팀 관계자들은 "유통사업 진출을 위한
사업계획을 새로 만들기 위해 현재 여러가지 사업을 검토하고있다"면서도
"국내최대기업인 삼성그룹과 부딪치지 않는 방안을 찾아내기가 그리
쉽겠느냐"고 푸념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삼성물산이 백화점사업을 시작하면서도 "백화점"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고 제품구성도 패션분야로 전문화하는 것도 신세계백화점과의 경쟁을
피해가려는 때문으로 업계에서는 보고있다.

삼성물산은 명동의 제일백화점을 패션전문백화점으로 바꾸면서
"유투존"으로 상호를 정했다.

화신백화점 자리에 신축중인 백화점을 젊은층이 많이 찾는 패션전문
백화점으로 꾸미고 상호를 "포어스( For us )존"으로 확정, 백화점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있다.

분당 서현역사에 들어설 민자백화점 역시 복합쇼핑공간으로 운영,
백화점과 차별화를 꾀하고있다.

삼성물산이 올해말 대구에 개점할 수퍼센터도 신세계백화점의 E마트와는
차이가 있다고 회사관계자들은 말하고있다.

E마트가 디스카운트스토어라면 대구수퍼센터는 1차식품분야를 강화한
하이퍼마켓에 가깝다는 것이다.

이건희삼성그룹회장의 장조카인 재현씨가 상무로 있는 제일제당은
강서구 가양동 김포공장부지 일부를 "시장"부지로 바꿨다.

소매유통업 분야에 새로 뛰어들기 위해서다.

이 회사는 아직까지 구체적인 업태를 결정하지 않았지만 신세계나
삼성물산에서 진행하고있는 분야와는 다른 쪽으로 유통업을 추진할
방침이다.

영화관과 오락시설을 갖춘 복합쇼핑몰을 만든다는게 가장 긍정적으로
검토되고있는 방안이다.

제일제당은 참여분야가 결정되는대로 부산 인천등에도 비슷한 형태의
유통업체를 만들 계획이다.

삼성가 기업들의 이같은 "서로 피해가기"움직임이 계속 실효를 발휘할
수 있을지는 물론 미지수다.

대구지역의 경우 신세계와 삼성물산이 내년께 할인신업태 유통분야에서
한판 승부를 벌여야 할 상황이다.

삼성물산은 올해말 대구 제일모직 공장부지에 수퍼센터를 설립하고
신세계는 내년5월 프라이스클럽을 개점한다.

제품구성에서는 차이가 있겠지만 보다 값싸게 제품을 구매하려는
대구지역 소비자들을 타킷으로 하기는 마찬가지다.

서울도심가에 들어서는 삼성물산의 "유투존"과 "포어스존"도 같은
상권에 위치한 신세계백화점 본점과 경쟁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대상고객연령이 다르지만 패션분야를 전문적으로 취급한다는 점에서는
같기 때문이다.

유통업계에서는 삼성가 기업들이 서로 다른 유통분야에서 시작하더라도
결국 경쟁관계일수 밖에 없지 않느냐는 시각도 나오고 있다.

유통업 추세가 최근들어 업태간 구분이 없어지는 쪽으로 바뀌고
있는데다 기업속성상 먼저 앞서나가려는게 일반적인 현상이기 때문이다.

하여튼 상대방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려고 조심하고 있는것만은
틀림없는것 같다.

< 현승윤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6년 3월 2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