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무리의 장군들이 사령부 테이블위에 놓인 지도를 둘러싸고 불안한
눈으로 쥐가 걸어가는 방향을 쫓고 있었다.

쥐의 발에 잉크를 묻혀 놓아 쥐가 움직일 때마다 지도에 자국이 남았다.

그것은 1796년 나폴레옹군에 연패한 나머지 절망에 빠진 오스트리아군의
작전회의 장면이었다.

그러나 쥐는 오스트리아군을 전멸의 수렁으로 몰아 넣었다.

인간의 지능으로는 예측할수 없는 미래의 일을 주술의 힘에 의지해 추리
또는 판단하고자 하는 이러한 점복은 인류생활의 시자과 더불어 양의 동서,
문화정도의 고저에 관계없이 존재해 왔다.

일찌기 바발로니아에서는 별의 변화로 점을 치는 점성술과 동물의 간장
따위로 점을 치는 내장점이 발달했다.

고대그리스인들은 동그라미를 24칸으로 나누어 칸마다 알파벳 글자
한자씩을 써놓고 옥수수 한톨씩을 놓은 다음 원의 중심에 수탉을 올려놓아
옥수수알을 쪼아 먹은 칸의 알파벳 글자를 순서대로 배열하여 점을 쳤다.

고대로마에서는 고추씨를 불에 던져서 그것이 타는 모양을 보고 길흉을
판단했다.

서양에서는 그밖에도 막대기로 지하수나 광맥을 찾아내는 점법, 무심히
책을 펼쳐 먼저 눈에 들어오는 문장을 지침으로 삼아 점을 치는 개전점도
있었다.

동양에서는 예로부터 인도의 점성술과 중국의 복서가 발달했다.

중국의 대표적인 점복인 복서의 "복"은 짐승의 뼈나 거북이의 껍질을,
"서는 셈을 하는 대나 나무 토막 또는 동전을 각기 이용하여 행하는
점이다.

"서"의 판단 근거는 "주역"이었다.

한국의 점법도 중국의 영향을 받아 상고때부터 복서의 점법이 성행했다.

점복을 전문적으로 관장하는 관리와 관청이 있게까지 되었다.

신라때는 일공 일자 사자로 불리는 관리가 관상감에, 또 고려때는
복박사직과 복정직의 관리가 태학국 또는 태복감에 각기 소속되었다.

조선조에는 복사가 서운관에 두어졌다.

복사는 오늘날 점장이로 불리는 박수(남자무당)의 연원이다.

과학이 발달된 현대에 들어와서는 이러한 관직이나 관청의 존재가 있을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지만 우리의 의식 깊은 곳에선 몇천년동안 도사려온
점복사상의 그늘을 지워내지 못하고 있는것 같다.

최근 선거철을 맞아 서울의 점집들이 성업이라는 소식이니 말이다.

입후보지망생이나 입후보자들의 답답한 심정은 헤아릴수 있는 바이지만
"오스트리아 장군들의 전철"을 되밟을게 틀림없으리라는 생각을 떨쳐버릴순
없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3월 2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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