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옥은 설반이 자기를 속인 일에 대하여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따끔하게 주의를 주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나는 아버님이 부른다는 전갈을 받은 이상 아버님에게로 가보아야겠어.

아버님이 나를 부르지 않았다고 하면 배명이가 그러더라고 할 거야"

이 정도 이야기했는데도 배명과 설반의 얼굴이 퍼렇게 질렸다.

"이이구, 도련님, 그러시면 난 죽습니다"

보옥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배명이 이마를 땅에 대며 통사정을
하였다.

"너를 속인 거 정말 잘못 했어. 다시는 그러지 않을게.

제발 네 아버지에게는가지 말어. 보옥이 너에게 긴요하게 할 이야기가
있어 그랬단 말이야"

설반도 손뼉을 치며 좋아하던 두 손을 합장을 하듯이 모으며 쩔쩔
매었다.

긴요하게 할 이야기가 있어서 그랬다는 말에 보옥은 배명을 호통치는
것으로 그 일을 일단락지었다.

"이 엉큼한 녀석, 언제까지 그렇게 무릎을 꿇고 있을 거야"

배명이 보옥의 마음이 풀린 것을 눈치 채고 안도의 기색을 띠며
일어섰다.

그 기회를 놓칠세라 설반이 보옥의 소매를 끌어당기며 보옥을 불러낸
사유를 이야기하였다.

"이번 오월 초사흗날이 내 생일이잖아. 그래서 벌써부터 생일 선물이
들어오는데 말이야. 정일흥이 알지?"

"알고 말고. 골동품 장사로 요즈음 돈을 좀 벌었다더군"

"그래서 그런지 진귀한 선물들을 보내왔다니까.

영백향으로 그을러서 구운 섬라(오늘의 타이)돼지도 있고, 처음 보는
팔뚝만한 생선에다가 엄청나게 큰 수박이랑 이만큼이나 길고 굵은 연뿌리
들도 있어"

설반이 두 팔을 활짝 뻗어 연뿌리가 얼마나 긴가를 나타내 보였다.

설반의 말만 들어도 보옥의 입안에 군침이 돌았다.

"집안 어른들께도 얼마씩 두루 나누어주었지만 그래도 아직 제법
남았어.

그래 몇몇 친한 사람들을 청해서 같이 먹을까 하는데 친척 중에서는
보옥이 너밖에 다른 사람이 있어야지.

첨광, 정일흥, 호사래, 선빙인 들은 이미 와 있어.

노래를 잘 하는 어여쁜 가기도 한 명 불렀지"

설반은 보옥을 자기 서재로 데려가 하인들에게 주안상을 차리게
하였다.

정일흥의 선물들을 중심으로 차려진 그 주안상은 과연 먹음직한
음식들로 그득하였다.

섬라 돼지고기에서는 영백향 향기가 은은히 풍기고 있었고, 수박과
연뿌리도 설반의 말대로 그 크기가 어마어마하였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3월 2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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