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의 수도 멜버른시내를 관광하다 보면 얼핏 봐도 한국과 관련이 있음을
짐작케 하는 상호 하나를 곳곳에서 만나게 된다.

이름하여 ''SUJI KIM COLLECTION''.

세계유명상표들과 당당히 어깨를 겨루며 다운타운의 쇼위도를 장식하고
있는 한국산 여성의류상표다.

이 상품의 수입업체는 HARRY KIM PTY사.

현지 한국교포인 김현식사장(43)이 지난 87년 설립한 이 회사는 멜버른
시내에만 6개의 직영매장을 경영하면서 호주 각주의 40여개 소매상들에게
연간 100만달러 이상의 한국산 여성의류를 공급하고 있다.

또 금년중 3개의 직영매장을 새로 개점할 예정으로 있는 등 하루가 다르게
커가고 있는 성장기업이다.

이 회사의 김사장을 만나보면 말쑥한 외모와 세련된 매너에서 성공한
사업가의 면모를 금방 느낄수 있다.

한마디로 고생이라고는 모르고 자랐을 것같은 "도련님"상이다.

그런 그가 호주대륙에 첫발을 내디뎠을때의 직업이 청소부였다는 사실을
알고나면 사람들의 입에서 절로 감탄사가 흘러나온다.

한국에서 중소무역업체 중견사원으로 근무하던 김사장은 결혼 1주년이
거의 돼가던 어느날 갑자기 호주행 이민을 결심했다.

그때 한창 "지구상의 마지막 낙원"으로 불리며 한국인들에게 신천지로
다가왔던 호주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고 싶다는 막연한 충동에서였다.

만삭의 몸인 부인을 이끌고 호주땅에 발을 내린게 84년 2월.

그러나 특별한 기술도 없고 영어실력도 겨우 의사소통만 가능한 정도인
그가 호주에서 좋은 직장을 얻기는 쉽지 않았다.

몇차례의 시도 끝에 그가 얻은 첫 일자리는 자그마한 출판사의 청소부.

서울에서 넥타이 매고 근무하던 시절의 기억은 이때부터 아예 잊어버렸다.

부인이 출산을 하고 식구가 하나 더 늘어나면서 청소부일만으로는 생활이
더욱 빠듯해졌다.

그는 "기왕 시작한 고생"이라는 생각에 회사에 안나가는 주말마다
노천시장에 선글라스 좌판을 벌였다.

호주의 여름햇살이 유별나게 따갑다는 사실에 착안한 부업이었다.

그러나 불과 450달러의 밑천으로 시작한 이 "부업"이 김사장으로 하여금
사업가의 꿈을 실현하게 하는 계기가 될 줄은 그 자신도 기대치 못했다.

노점을 시작한 첫날 620달러의 매상을 올려 장사의 맛을 알게 된 것.

450달러를 투자해 올린 매상으로는 대성공이 아닐 수 없었다.

이렇게 선글라스로 시작한 김사장의 노점상은 겨울철에는 털목도리와
장갑으로 품목을 바꿔가며 본격적인 사업밑천을 축적하는 밑거름이 됐다.

물론 이 과정에서의 고생은 이루 형언할 수 없었다.

하루종일 장사에 시달린 몸이면서도 밤이면 한 푼의 손실이라도 줄이기
위해 안경과 장갑의 불량품을 수선해야 했다.

목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이른 새벽부터 자리순서를 기다리며
차안에서 새우잠을 자는 것도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타고난 근면성과 이대로 한국에 다시 돌아갈 수는 없다는 집념으로
버티기를 2년여.

드디어 김사장이 오늘날과 같이 성공한 기업인으로 변신할 계기가
찾아왔다.

한국의 친지가 보내준 앙고라 스웨터를 입고 장사하는 부인에게 손님들이
보이는 관심과 찬사가 그냥 인사치레가 아님을 깨닫게 된 것.

새로운 사업가능성을 찾은 김사장은 한국의 친지에게 부탁해 시험삼아
앙고라 스웨터 50벌을 소포로 들여왔다.

현지시장에 앙고라 스웨터는 처음 선보이는 제품이어서 가격을 얼마나
받아야 할지 몰라 망설이다가 "안 팔리면 말지"하는 심정으로 500%의 높은
마진을 붙였다.

그런데 소비자들의 반응은 기대이상이었다.

앙고라스웨터는 좌판에 걸어놓기가 바쁘게 순식간에 동이 났다.

그때까지만해도 단조롭고 투박한 옷만 접하던 호주인들에게 자수블라우스와
앙고라 니트의 출현은 한마디로 획기적인 것이었고 새로운 패션제품으로
크게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자신감을 얻은 김사장은 그동안 모아 놓은 전재산을 털어 본격적으로
옷 장사에 나섰다.

이때부터 김사장의 사업가로서의 자질이 조금씩 빛나기 시작했다.

그동안은 한 자리에서 부인과 함께 장사를 했으나 이제는 부인도 다른
장소에 좌판을 마련했다.

옷 장사의 속성상 "유통점포"가 많을 수록 광고효과도 낼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그의 판단은 적중해 김사장이 한국에서 들여온 자수블라우스와 니트는
이내 멜버른 시내의 화제가 됐다.

소문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많은 소매업자들이 물건 공급을 요청했고
한국인 교포들도 앞다투어 도매를 간청해 각 지역의 판매망을 어렵지 않게
확보해 나갈 수 있었다.

별도의 광고가 없이도 짧은 시간에 전 멜버른지역에 거래선이 확장돼 갔고
일부 소매업자들은 다른 주로 이주해가면서까지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는
역할을 했다.

여기서 김사장은 다시한번 사업가로서의 자질을 발휘했다.

한국에서 수입하는 의류에 "수지 김 콜렉션"이라는 브랜드를 만들어 붙인
것.

수지 김은 부인의 영어 이름이었다.

이와함께 다소 무리를 해가면서도 시내 유명 쇼핑센터에 직영 체인점을
마련했다.

브랜드이미지를 고급화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이것이 결과적으로 김사장과 거래하는 소매업자들에게도 판매촉진 효과를
내 거래선은 더욱 늘어났다.

사업운이 따라서인지 "수지 김 콜렉션"상표는 호주국내뿐 아니라 바다건너
제3국에도 알려지게 됐다.

호주에 거주하는 외국이민자들이 자기네들 본국으로 김사장의 제품을
선물로 보내면서 새로운 소비자들을 창출한 것이다.

이 덕분에 한국에 있는 의류업자들이 덩달아 호황을 누리기도 했다.

김사장이 블라우스와 앙고라 니트 수입을 통해 사업을 확장해 나가던
86년에서 90년사이에 이제품의 수출시장은 일본 대만등에 국한돼 있었다.

그런데 91년이후부터는 세계 각국에서 한국으로 자수블라우스와 앙고라
제품들의 주문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이상과 같은 김사장의 성공담에는 단지 행운만이라고는 할 수 없는 몇가지
요인이 있었다.

우선 한국교민이 외국에서 성공하려면 무엇보다도 현지법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 김사장의 주장이다.

그중에도 특히 세법을 잘 지키는게 중요하다고 거듭 강조한다.

실제로 호주에서는 이민자들이 갖은 고생끝에 돈을 모았다가도 호주 국세청
세무조사에서 탈세사실이 발각돼 엄청난 벌금을 물고 도중하차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한다.

김사장은 또 값싸고 마진이 좋은 중국산 옷을 외면하고 오직 한국산 옷만을
고집하고 있는 점도 자신의 성공요인으로 꼽는다.

최근 호주시장에 저가의 중국산 의류가 범람하고 있지만 품질과 디자인이
한국산에 훨씬 못미쳐 고급브랜드를 지향하는 "수지 김 콜렉션"에는 부적합
하다는 생각에서다.

또 오늘의 자기가 있게 만들어준 한국의 거래선들을 배신할 수 없다는
사업상의 신의도 작용하고 있다.

대신 김사장은 나름대로의 소매거래선 관리전략으로 중국산의 저가공세에
맞서고 있다.

많은 자본을 투자,중국산에 비해 훨씬 다양하고 우수한 디자인을 확보함
으로써 소매거래선들에게 만족할 수 있는 수익성을 보장하는게 그의 첫째
전략이다.

또 월별 매상증가분의 일정비율을 소매상에게 분배함으로써 자신의 이익만
챙기는게 아니라 전체거래업체와 이익을 공유한다는 일체감을 갖게 했다.

김사장이 무리를 해가면서 직영매장을 확보한 것도 사업을 지속적으로
번창시킬 수 있는 발판이 됐다.

자사 직영매장을 통해 소비자들의 선호유형과 수시로 변하는 패션감각을
쉽게 감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호주의 큰 의류수입업체들은 대부분 막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저가
중국산 의류를 대량 수입, 현지 백화점이나 도매업체에 한탕주의로 공급하고
있다.

때문에 패션이 수시로 바뀌는 여성의류 시장동향에 효율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장기적으로는 이들 제품을 공급받는 소매상들간에 과당경쟁을 조장
하는 경향이 있다"는게 김사장의 설명이다.

김사장이 한국산 의류만 갖고도 성공하게된 마케팅 비결의 또 한가지는
상권을 세분화하여 지역별로 1개 거래업체만 선정했다는 사실이다.

"자사의 제품을 공급하는데만 욕심을 부려 한 지역내 여러업체들을 상대로
공급하게 되면 이들 소매상들간의 과당경쟁으로 제 가격을 받지 못할
뿐아니라 저가브랜드로 인식돼 끝내는 시장에서 밀려나게 된다.

이는 한국수출업체들이 해외시장 개척시 참고할 만한 점"이라고 김사장은
강조한다.

이역만리의 땅에서 청소부로 출발해 땀과 열성만으로 중견사업체를 일구어
낸 김현식사장.

"앞으로 한국산 남성의류도 수입하고 웬만큼 자본이 축적되면 호주내 대형
쇼핑센터를 인수해 주로 한국상품만 판매하는 곳을 마련하겠다"는 그는
한국인이 낳은 또 하나의 자랑스런 얼굴이다.

<임혁기자>

(한국경제신문 1996년 3월 2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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