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를 말하기를 두려워 하는가"라는 책이 있다.

미국의 신부이자 저명한 심리학자인 존 포웰이 쓴 이책이 국내에 처음
번역돼 나온 것은 78년이었다.

다소 길고 직설적인 제목의 이책은 당시 적잖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었다.

"자신을 털어놓으라. 가까운 사람은 물론 주위의 모든 사람에게 부족함과
장점을 함께 솔직히 고백하라. 먼저 자신의 마음을 열지 않는한 외로움을
면하기는 어렵다"는 요지는 남녀 모두 스스로에 대한 얘기를 자제하는 것을
미덕으로 알던 시절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로부터 20년이 채 안된 오늘날 세상은 많이 변한 듯 보인다.

자신에 대해 말하기를 두려워하기는 커녕 읽는 사람이 쑥스러울 만큼 온갖
사실을 털어놓은 자전에세이집의 출간이 붐을 이루는 까닭이다.

실제로 2~3년전부터 여성들의 자전에세이집이 부쩍 늘어나더니 지난해말
부터는 정치가내지 정치지망생들의 자전에세이집이 1주일에 평균 2~3권씩
나올만큼 많아졌다.

4.11총선을 겨냥,자신을 보다 널리 알리려는 의도에서 내놓는 이같은
책들은 몇가지 공통점을 지닌다.

책의 앞뒤면에 저자의 이름과 사진이 크게 실리고 앞표지 이면에는 갖가지
경력이 빽빽하게 수록된다.

남성출마자의 경우 부인에 대한 고마움과 사랑을 표시하는데 상당한 지면을
할애하고 있는 것도 눈에 띈다.

선거 출마자들이 책을 내는 것은 비단 우리나라의 경우만은 아니다.

미국에서도 선거가 있는 해에는 출판량과 도서판매량이 여느해보다 25%이상
증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지난해에는 대선후보로 나서려던 깅리치 하원의장과 콜린 파월
전합참의장이 출판물대결을 벌였고 올들어서는 댄 퀘일 전부통령과 짐
라이트 전하원대변인, 클린턴대통령의 최측근인 제임스 카빌등이 잇따라
책을 펴냈다.

그러나 이들의 경우 대부분의 책은 후보자 개인의 이력홍보가 아니라
소속정당의 정책을 알리는데 초점이 맞춰진다.

힐러리 클린턴이 최근 출간한 책 또한 남편의 위대함과 자신의 희생적인
내조를 강조한 것이 아닌 "아이들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과 충고"이다.

이에 비해 우리 출마자들의 책속에서 정책을 다룬 것은 찾기 어렵다.

정책과 관련된 것이 전혀 없지는 않지만 대부분은 자신이 얼마나 "훌륭하고
착하고 인정스러운, 그리고 의지의 한국인"인지 알리는 내용으로 이뤄져
있다.

물론 출마자의 경우 자신을 제대로 알리는 일이 무엇보다 급선무인 상황
에서 공식선거운동기간은 짧다 보니 자전에세이집 출간이라는 방법을 택했을
수 있다.

1회용 전단이나 소책자보다 책이 한결 설득력을 지닐뿐만 아니라 책을
내면 매스컴을 통해 이름을 보다 널리 알릴수 있고 또 출판기념회를 개최,
합법적으로 집회를 가질수 있는 등 유리한 점이 많다.

자신에 관한 루머에 대해 해명할수도 있고 직접 만날수 없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얼마나 인간적이고 유능한지" 거듭 강조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실상 출마자들의 책중 상당수는 조금만 펼쳐보면 홍보용으로 급조된
것임을 알수 있다.

더욱이 새벽 4~5시부터 밤12시가 넘도록 뛰어다녀야 한다면서 언제 그 많은
원고를 직접 썼을까 궁금해지는 대목도 없지 않다.

단행본 1권(신국판 250쪽내외,2,000권 인쇄 기준)의 제작비는 500만~
600만원(원고료 제외).

일간지 광고료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5단반쪽짜리 1회에 최소 400만~
500만원, 잘 보이는 지면 5단 전체에 하려면 1,000만원도 감수해야 한다.

결국 책 1권을 출간, 1개신문에 1회 광고만 하더라도 최소한 1,000만원은
든다는 계산이다.

혹 누군가에게 대필시킬 경우 원고료를 지불하고 2개지 정도에 광고하려면
2,000만~3,000만원은 있어야 한다는 결론이다.

1,000만원만 든다고 하더라도 10만원씩 내는 후원자 100명이 필요한
셈이다.

책은 읽는 사람이 진정 공감하고 겉장이 헤질 때까지 곁에 두고 보며 다른
사람에게도 권할 때 가치있는 것이다.

독자가 "뻔한 내용"이라고 생각, 한쪽으로 밀쳐둔다면 아무 소용이 없을
뿐만 아니라 자칫 출판공해물까지 될 수 있다.

갑자기 큰돈을 들여 여기저기 얼굴사진을 담은 책을 출간하기보다 몇년동안
만나지 못했거나 아예 얼굴도 모르는 동창후보에게서 후원회비 지로용지를
받고 난감해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국회의원 후보가
많아지기를 기대한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3월 2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