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운과 소홍의 거리가 점점 좁아졌다.

소홍은 추아에게 말을 거는 척하며 가운을 흘긋흘긋 쳐다보았다.

가운도 곁눈질로 소홍을 훔쳐보았다.

서로 시선이 부딪칠듯 부딪칠듯 어긋났다.

그러다가 한순간 둘의 눈길이 마주치게 되었는데, 가운의 두 눈에서는
불길이 확 이는 듯했다.

소홍은 가운의 시선의 뜨거움을 느끼고 고개를 돌리려 하였으나 그대로
온몸이 굳어진 채 얼굴만 붉어졌다.

가운은 소홍에게 뭔가 말을 하려고 하다가 추아의 눈치를 보며 그냥
지나쳤다.

소홍도 잠시 심호흡을 한 후 걸음을 떼어놓았다.

가운이 추아의 안내를 받아 이홍원으로 들어가니 널찍한 정원이
펼쳐졌다.

기암괴석이 띄엄띄엄 놓여 있고 그 바위들 사이사이에 파초가 심겨
있었다.

저 건너편 소나무 밑에서는 학 두마리가 긴 부리로 열심히 겨드랑이를
쪼고 있었다.

이쪽 회랑에는 갖가지 진귀한 새들이 들어가 있는 새장들이 즐비하게
매달려 있고 새 울음소리들로 요란하였다.

가운은 조금 더 올라가 "이홍쾌록"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 다섯칸
짜리 아담한 집안으로 들어섰다.

보옥은 간편한 실내복 차림으로 헝겊신을 신고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어
책을 읽고 있다가 가운이 들어서자 얼른 책을 내려놓으며 반색하는 얼굴로
일어났다.

보옥이 옆에 놓인 의자를 가리키며 가운에게 자리를 권했다.

보옥도 맞은편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몇달 전에 한번 만나서 나에게 놀러오라고 해놓고는 그만 깜빡 잊고
있었어. 그동안 몸도 아팠고"

"아저씨 병환이 낫게 되어 천만 다행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걱정하였는지요"

그러면서 가운이 보옥의 안색을 살피니 이제는 건강을 완전히 회복한
듯이 보였다.

"조카도 고생하였지. 내가 제정신이 아닐 때 조카가 시동들을 시켜
교대로 지키도록 했다는 이야기는 할머니에게 들어 잘 알고 있어"

이렇게 인사들을 나누고 있을 때 습인이 차를 들고 들어와 가운 앞에
놓았다.

가운은 일전에 습인을 본 적이 있긴 하지만 오늘 보니 새삼 아름답게
보였다.

은빛 무늬가 박힌 붉은 비단 저고리와 청단 조끼, 주름이 촘촘히 잡힌
하얀 능단 치마와 같은 깔끔한 의복들이 습인의 아름다움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가운은 습인이 감독하고 있는 견습시녀 소홍에 대한 상념으로
가득차 있어, 습인이 소홍을 잘 대해줘야 할 텐데 그런 생각만 하고
있었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3월 2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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