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홍이 표정이 조금 어두워지자 가혜가 슬그머니 웃음을 거두며
소홍의 건강을 염려해주는 말을 해주었다.

"언니, 어디 아픈거 아니에요?

요즘 밥도 제대로 안 먹는것 같던데 며칠 집에 가서 쉬었다 오는게
어때요?

약이라도 몇첩 지어 먹고"

"아니야. 집에 가서 쉴만큼 그리 아프지는 않아"

소홍이 머리를 저으며 창 너머 원정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가혜가 볼때 소홍의 그 모습이 더욱 쓸쓸해 보였다.

가혜가 얼른 화제를 돌렸다.

"보옥 도련님은 다 죽어가더니만 이제는 아주 건강해져서 방을 이렇게
꾸며야 한다는 등, 옷은 이렇게 입어야 한다는 등, 사사건건 잔소리가
많대요.

마치 한 백년이라도 살것처럼 말이에요. 호호"

"그러고 보니 중들이 말한 서른세 밤도 며칠있으면 끝나는구먼.

그러면 보옥 도련님도 다시 대관원 이흥원으로 돌아오겠지"

보옥이 돌아오면 가운이 보옥에게 놀러올 수도 있을 것이고 그때
가운을 만나볼수도 있지 않은가.

소홍은 그 서른세 밤이 속히 지나가기를 마음으로 소원하였다.

며칠후 과연 보옥이 건강한 몸으로 이흥원으로 돌아왔다.

하루는 소홍이 방 안에 앉아 있는데 문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누군가 하고 소홍이 문 쪽을 바라보니 어린 시녀가 손에 수본과 종이
두장을 들고 들어섰다.

그 시녀는 소홍에게 가히 언니의 부탁이라면서 수본 두개를 떠달라고
하였다.

견습시녀 딱지를 조금 일찍 떼었다고 그런 부탁을 하는 가하가 미웠지만
소홍은 꾹 참고 수본을 뜨기 위해 붓을 찾았다.

그런데 눈에 띄는 것은 모두 문드러진 붓들 뿐이고 얼마 전에 갖다놓은
새 붓은 보이지 않았다.

"가만 있자, 새 붓이 어디 갔지? 아참, 지난번에 앵아가 가져갔지"

소홍은 앵아에게 빌려준 붓을 찾아오기 위해 이홍원을 나서 보채가
기거하는 형무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뒤에서 누가 쪼르륵 따라와 말을 건넸다.

소홍이 돌아보니 견습시녀 추아였다.

"넌 어딜 가니?"

"보옥 도련님이 가운 도련님을 모시고 오래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소홍의 가슴은 마구 뛰기 시작했다.

추아가 소홍을 앞질러 뛰어가고 소홍은 생각에 잠겨 천천히 걸어나갔다.

소홍이 봉요교 어구에 이르렀을 때 맞은 편에서 추아와 가운이 다가오는
곳이 보였다.

얼마나 마음 속으로 그리던 가운의 모습이었던가.

소홍은 이게 꿈인가 싶어 어찔 현기증이 일었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3월 2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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