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28년전인 1968년, 안암골에서 새끼호랑이로 탄생한 서로 학과가
다른 4명의 학생이 고대방송국에서 만났다.

그들은 아나운서로, 성우로, MC로 스크립터로 새활하면서 대학방송경연
대회에 참가하기도 했다.

그렇게 학창시절에 방송써클활동을 하며 자질을 키워나갔지만 정작 지금
방송계에서 활동중인 친구는 국문학을 전공한 이주택군(현 KBS 춘천방송국
편성국장)뿐이다.

신방과를 졸업한 이용진군은 현대자동차 이사로 재직중이며 불문학을
전공한 홍덕기군은 LG화학 홍보이사로, 그리고 정외과를 졸업한 필자는
LG복지재단의 상무로 재직하고 있다.

우리 넷이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게 된것은 1980년 지방에서 근무하던
이주택군이 KBS 본사로 올라오고부터이다.

세월이 흘러 총가들이 짝을 찾아 가정을 이루었는데 홍덕기군만을 제외
하고는 필자를 비롯한 셋은 모두 교편생활을 하는 선생님들을 아내로 맞아
여덟명으로 불어난 우리는 모임의 이름을 "친구로서 만나다"는 뜻을 지닌
"이우회"로 정하고 매월 서로의 집을 돌아가면서 꼬박꼬박 만나기 시작했다.

그러다보니 자식들간에도 친하게 지낼뿐 아니라 친구의 부모님 역시도
마치 내부모님과 같은 정이 들기도 했다.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학교친구 사이는 스스럼없이 이름을 부를수 있어
좋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호를 하나씩 갖고 그 호를 불러주는 것이 좋다며
고대방송국 2년 선배인 이계진아나운서가 우리에게 당호를 하나씩 지어
주었다.

각자의 성품과 꿈을 토대로하여 이용진군은 석중으로, 이주택군에게는
상춘을, 홍덕기군은 우선, 그리고 필자에게는 향산으로.

우리는 비록 우리끼리만 아는 호이기는 하지만, 그 호를 서로 불러가며
여송 이승만에게 각을 부탁하여 석중지헌, 상춘제, 우선당, 향산제라는
현판을 하나씩 만들어 가지고 있다.

현직에서 물러나고 나면 공기좋고 물맑은 곳을 찾아 들어가 공동전원주택을
지어 노년에 함께 모여 살자는 꿈이 이루어질때 각자의 방에 그 현판이
걸려질 것이다.

이우회는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매월 적립한 회비를 모아 88년도에
아내들의 공동명의로 우선 강원도에 조그마한 땅을 사두기로 했다.

남편들이야 업무상 해외출장을 다니기 때문에 이곳저곳 다녀볼 기회가
있지만 어린 자식들을 키우며 가정살림을 꾸려나가야 하는 아내들이
해외나들이를 한다는 것이 그렇게 쉽지 않은 일인데 지난 89년 여름휴가때
서로 날짜를 기적적으로 맞추어 4박5일간의 일정으로 일본여행을 다녀왔다.

처음 해외여행을, 그것도 비용이 다소 비싸게 들기는 하였지만 이우회
회원들만으로 오붓하게 떠나게 되었을때 우리 모두는 수학여행을 떠난
아이들처럼 들떠하면서 너무너무 좋아했다.

그이후 특히 아내들은 언제 또 우리모두가 함께 해외여행을 갈수 있을까
하고 꿈을 키워왔다.

건강과 시간돠 돈, 이 세박자가 맞아야 해외여행을 떠날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작년에 이우회에 또 한번의 기회가 6년만에 찾아왔다.

매월 부어왔던 적금이 만기가 됨에따라 큰 마음먹고 7박8일간의 여정으로
꿈에 그리던 유럽(불란서, 스위스, 이태리)여행을 다녀온 것이다.

우선 부부네는 그당시 다른 사람들과 동구라파쪽 여행을 다녀올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포기하고 우리와 함께 여행을 가서
박수를 받기도 했다.

그만큼 이우회의 만남을 소중히 여기고 있기 때문이었으리라.

어쩌다 사정이 있어 만나지 못하고 한달을 건너뛸 때에는 아내들이 더
성화를 부린다.

16년동안을 한결같이 그렇게 만나다보니 이제는 친구의 부인이라 해서,
남편의 친구라 해서 어렵게 생각되거나 체면을 차리는 부담도 없어졌다.

영화, 연극, 음악회 등을 다니며 문화생활을 즐기기도 하고, 노래방을
찾아가 마음껏 노래솜씨를 뽐내기도 한다.

현직에 있을때까지 열심히 일하고 이제 은퇴후에는 우리도 불우한 이웃을
위해 일하며 살자는 다짐을 하면서 금년 여름휴가때에는 회사에서 파견하여
쉰의 나이로 뒤늦게 미국에 건너가 공부를 하게된 석중을 위로도 할겸 모두
미국으로 여행을 해보자는 야무진 꿈을 꾸고있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3월 1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