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이 공식적으로 해외이민을 시작한것은 지난 1902년.

하와이농장으로 품을 팔러간 101명이 최초의 ''필그림 파더''들이었다.

그들로부터 거의 1세기가 지난 지금 해외동포의 숫자는 500만명을
헤아린다.

아프리카 오지에서부터 선진국의 메가로 폴리스에이르기까지 한민족의
발길이 안닿는 곳이 없을 정도다.

최근에는 타향살이가 싫어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는 ''역이민''현상도
나타나고 있지만 대부분의 해외동포들은 현지에서 착실하게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고 있다.

이중에는 현지에서 기업인으로 큰 성공을 거둔 교민도 적지않다.

이들은 특히 해외시장에 진출하는 한국기업들에는 현지시장에 진출하는
한국기업들에는 현지시장의 가이드역할을 해줄수 있는 또 다른 의미의
''인프라''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최근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가 해외무역관을 통해 찾아낸
''세계속의 성공 한국인''들을 주1회씩 30여회에 걸쳐 소개한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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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사-무역진흥공사 공동]

네덜란드에서 A-4고속도로를 타고 달리다보면 "롤로프아랜드스페인"이라고
하는 자그마한 도시를 만나게 된다.

비록 규모는 작지만 요즘 한창 유럽의 유통분배센터로 명성을 쌓아가는
도시다.

유럽에서 나가는 물량의 60%, 유럽으로 들어오는 물량의 30%가 통과하는
세계최대의 항구도시 로테르담을 이웃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럽교민사회에서 "가장 성공한 한국인"으로 부러움을 사고 있는
황용오사장의 "용고유럽"본사도 바로 이 소도시에 자리잡고 있다.

고속도로를 벗어나 YONGO EUROPE 이라는 팻말을 따라 회사입구로
들어서면 " OSIO "" ARRIVEE "라고 쓴 대형 입간판 2개와 2,000평방미터
정도 되는 커다란 창고시설이 방문객을 맞는다.

이 세가지가 용고유럽이 하는 사업내용을 대변해준다.

"용고유럽은 자체공장 없이 보세창고를 갖추고 하청생산한 제품을
판매하는 유통업체입니다.

현재 "아리베"라는 의류브랜드로 유럽내 25개국, "오시오"라는 전자제품
브랜드로 29개국에 판매하고 있고 앞으로는 폴란드와 러시아지역으로의
마케팅도 강화할 생각입니다" 회사현황에 대한 황사장의 간략한 소개다.

황사장이 네덜란드에 첫발을 내디딘 것은 지난 71년4월.

국내 중소기업들의 해외시장 개척창구인 고려무역의 네덜란드 지사
창설요원으로서였다.

국내기업중 네덜란드 시장개척의 효시로 알려져있는 한성실업이 76년
현지지사를 설립한데 비해 5년 앞서 진출한 셈이다.

당시만해도 국내기업의 현지진출이 전무했을 뿐 아니라 양국간
연간교역량도 1억달러를 채 넘지 못하던 열악한 상황이었다.

이런 악조건속에서도 황사장은 당시 우리의 주종 수출품의 하나였던
Y셔츠를 들고 "메이드 인 코리아"를 알리기 위해 발이 부르틀 정도로
뛰어다녔다.

소위 일류대학(서울상대)출신으로 보다 안락한 직장을 찾을수도
있었지만 수출한국의 신화를 창출하겠다는 일념이 그를 사로잡았다.

이런 열정과 노력이 결실을 맺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지사설립 2년만에 현지시장에서 한국산 판매물량이 대만 홍콩산의
2배가 넘게되고 바이어들과도 돈독한 관계가 형성된것.

바로 그즈음 전혀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실망스런 소식이 들려왔다.

자신이 몸담고 있던 고려무역이 지사를 철수키로 했다는 소식이었다.

가까스로 쌓은 기반을 포기하고 본국으로 돌아갈 것인가를 놓고 심각한
고민을 하던 황사장은 결국 이제 막 영글기 시작한 열매를 자신이 스스로
거두겠다는 결단을 내렸다.

73년5월 고려무역을 퇴사하면서 현지지사를 인수한 것이다.

이회사가 바로 오늘날 황사장을 유럽에서 가장 성공한 한국기업인으로
만들어준 용고유럽이다.

황사장은 이후 70년대와 80년대 어려운 사업여건 속에서도 용고유럽을
자산규모 500만달러 종업원수 30명에 20여개국에 딜러망을 갖춘 매출규모
3,450만달러의 중견무역회사로 키웠다.

맨주먹으로 시작한 황사장이 이처럼 성공한 사업가로 변신할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보다도 지사원시절부터 보여준 황사장의 열정과 의지였다.

이와함께 네덜란드라는 나라가 제공하는 사업기회를 정확하게 집어낸
사업가로서의 혜안도 또 하나의 밑거름이 됐다.

네덜란드 특유의 행정보세창고제도인 FEMAC 허가를 따냄으로써 본격적인
회사발전의 기반을 다진 것이다.

이 제도는 일반 보세창고와 달리 정부로부터 지정받은 회사가 스스로
관리하는 특별보세창고 제도를 말한다.

일반보세창고에서는 물건의 입출고시 세관원의 검사를 받아야하지만
FEMAC 에서는 이런 절차 없이 회사의 사후보고만으로 모든 통관절차가
끝나게 된다.

따라서 FEMAC 허가를 얻기 위해서는 기업의 신뢰가 밑바탕이 되지
않으면 극히 어렵다.

대신 허가를 얻게될 경우 그만큼 복잡한 절차를 거치지 않을뿐 아니라
비용도 대폭 절감돼 당해기업의 입장에서는 큰 혜택이 아닐수 없다.

황사장은 88년 네덜란드 정부로부터 FEMAC 허가를 받아낸후 FEMAC이
갖는 장점을 적절히 활용했다.

용고유럽이 불과 30명의 적은 직원으로도 연간 3,000만달러가 넘는
매출을 올릴수 있었던것도 FEMAC 가 갖고있는 장점을 최대한 활용한
덕분이다.

최근 황사장은 또 하나의 개가를 올렸다.

94년4월 농산물분야에서는 처음으로 쌀에 대해 FEMAC 허가를 받은
것이다.

관세수준이 공산품에 비해 높아 네덜란드 현지기업들도 허가받기가
어려운 농산물 분야에서 용고유럽이 FEMAC 허가를 받은것은 황사장이
현지시장에 얼마나 확고하게 사업기반을 다졌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밖에도 황사장은 두가지면에서 기업가로서 남다른 예지를 갖고
있었다.

첫째는 브랜드의 창출과 관리능력이다.

70년대초반 컨테이너 물량단위로 실어내던 당시 그는 의류분야에서는
"ARRIVEE"와 "GOLFER"S CLUB", 카라디오와 스피커 등 전자분야에서는
"OSIO"라는 자체브랜드를 개발해 지금까지 20여년간 사용해오고 있다.

당시로서는 미개척시장이었던 네덜란드에 처음부터 자체브랜드로
승부를 건것은 "결국에는 얼굴있는 제품만이 발을 붙일수 있다"는
점을 예견한 때문이었다.

황사장은 바이어가 원하는 바를 포착하는데 있어서도 남다른 능력을
발휘했다.

"회사매출의 60%를 점하고 있는 의류는 가격경쟁이 심하고 소량주문이
일반화돼 있다.

따라서 시장흐름과 바이어의 요구에 따라 패션과 디자인스타일등을
수시로 변형할수 있는 "제품콜렉션"이 용이해야 한다.

또 원단등 소재가 항상 높은 수준에서 균등해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따른다" 이런 판단아래 제품의 콜렉션과 관련, 황사장은 사업을 시작한이래
지난 20여년간 자신이 취급하는 물건은 대부분 한국에서 생산 수입하는것을
원칙으로 하고있다.

"하나의 제품을 100가지이상의 디자인과 색상, 칼라로 변형하여 양질의
제품을 공급할수 있는곳은 그동안 섬유가공분야에서 풍부한 경험을 쌓아온
한국밖에 없다"는 이유에서다.

황사장의 독특한 회사운영방식은 사내의 의사결정과정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참신한 아이디어를 찾기위해 일체의 회의를 브레인 스토밍형태로
진행하고 있는것.

20명이 넘는 마케팅매니저들은 각자 접하는 바이어의 의견과 각종 패션쇼
참관 등을 통해 수집한 최신 동향정보를 수시로 난상토론하고 그 결과는
영업활동에 즉각 반영된다.

그는 올 한햇동안 또다른 의미에서 사원의식개혁운동을 펼칠계획이다.

지난해 5월5일 회사창립 22주년을 기해 선포한 " Think One Step
Higher "라는 슬로건이 그것이다.

"독특한 분야에서의 부가가치 창출과 고객의 의사를 반영한 융통성
있는 의사결정, 이것이야말로 용고유럽이 갖고있는 최대의 장점이자
FEMAC 와 함께 그동안 회사를 발전시켜온 주요 원동력입니다.

한국기업들의 세계화방향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 세계적인
네덜란드 상인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그동안 드러내지 않고 묵묵히 메이드
인 코리아 제품의 성가를 현지에 알려온 황용오사장.

세계화의 지향점을 설명하는 그의 한마디 한마디에는 2000년대 전자와
섬유분야에서 톱클라스기업을 넘보는 강한 의지가 깔려있다.

< 임혁기자 >

[ 자료 : 암스테르담무역관 제공 ]

(한국경제신문 1996년 3월 1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