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주 < 서강대 경제대학원장 >


봄이 왜 이다지 더디 오는가.

엊그제 봄비가 내렸건만 아직 겨울옷을 벗고 완연한 봄을 노래하기엔
이르다.

3년전 이른바 문민정부가 출범하였지만 지난날 권위주의시대 잔재들이
곳곳에 버티고 있어 국민의 삶이 마음껏 생동하기에는 아직 써늘한 계절이다.

자칫 문민감기 안들까 조심하여야 한다.

일제에 신음하던 한반도에 한때 유행하던 "사의 찬미" 노래는 당시
젊은이들이 경험했던 심신의 고통, 허탈감, 무력감을 잘 표출했다.

노래따라 자살하는 예도 있었다.

광복 5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죽음을 찬미하고 이용하는 풍조가 우리생활
구석구석에서 꿈틀거리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실연, 신병, 가정불화, 입시낙방 등의 사유로 당신의 목숨을 끝내는 일들을
우리는 안타깝게 지켜본다.

그러나 진정 경계할 일은 남의 죽음을 자극하고 그것을 이용하는 행위이다.

이는 때론 세련된 예술적 형식으로, 때론 집단시위로, 때론 천박한 보상금
구걸행위로 표현된다.

노동운동 억압시기에 분신자살한 한 젊은이의 일생을 그린 영화가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잘 만든 영화라고들 한다.

그러나 왜 "아름다운 청년..."이란 제목을 달았을까.

"장한 청년"이랬다면 수긍이 갈만도 하였겠다.

앞으로 노동운동가들도 줄줄이 죽어야 아름다워지는가.

남의 죽음이라서 아름다운가.

요즘은 다소 잠잠하지만 폭력시위중에는 사상자가 발생하기 쉽다.

이렇게 희생된 사람들을 열사라 호칭하는게 재야운동권의 버릇이다.

앞으로 열사대열이 늘어날 것을 기대하는가.

본래 열사란 "나라를 위해 절의를 굳게 지켜 죽은 사람"을 말한다.

그리고 의사란 "나라를 위해 의로운 행동으로 목숨을 바친 사람"이다.

여기서 "의로운" 행동이란 국가와 민족의 원수를 살상하는 행동을 의미
한다.

다시 말해서 타인에게 신체상 위해를 가하는 공격행위를 한 사람을 의사
라고 부르고, 타인의 폭력에 의해 희생당한 사람을 열사라고 부르는 셈이다.

그런데 문제는 상대방측 견해가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중동의 하마스,북아일랜드의 IRA등 각지의 폭력집단보도를 접하면서
"테러리스트"라는 용어에 거부감없이 익숙해 있는 까닭은 입장의 차이 때문
이다.

인간사회문제 가운데 가장 어려운 문제는 쌍방이 동감하는 폭력, 인류가
함께 정당하다고 인정하는 "테러"가 있을수 있느냐의 문제이다.

유감스럽게도 선진국입네 하는 나라에서도 폭력이 합법화되는 상황들이
있다.

특히 군대 경찰등 국가의 공권력이 합법적으로 행사될 경우가 그러하다.

우리나라의 경우 국가의 합법성 정통성 자체를 인정하려들지 않는 것이
재야운동권의 특징이다.

이래서 양산되는 것이 국민 대다수가 공감하지 않는 열사와 의사들이다.

오다가다 희생된 운동권의 일부 인사들을 안중근 윤봉길 이준등 애국
지사들과 같은 반열에 오를 공적자로 치받들어 역사가 바로 쓰이는가.

재야인사들의 목적지향에 찬동할수 없는 대목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상의 사례보다 우리를 더욱 비참한 국민으로 전락시키는 것은 시체를
앞에 두고 보상금을 올리려 떼를 쓰는 시위행위이다.

크고 작은 사고발생때마다 유가족들은 왜 죽은 이의 인격과 품위를 생각
하지 않는가.

가족의 죽음은 억만금을 받아도 보상받을 수 없을만큼 비통한 이별의 슬픔
이자 고통일 것이다.

사체 인수대금을 얼마로 목표를 정하고 한푼이라도 더 받아내려고 폭력
시위마저 마다하지 않는 일들이 그치지 않고 이어져 왔다.

이러고도 선진문화국민이기를 바라겠는가.

죽음은 엄숙한 예의로 조문할 일이다.

죽음을 찬미하는 사회는 병든 사회이며, 남의 죽음을 자극하는 사회는
폭력사회이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3월 1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