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작더미 옆에서 한숨을 길게 내 쉰 소홍은 그 자세 그대로 하염없이
서 있었다.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하는 것 같기도 했고 아무 생각도 없이 넋을 놓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무슨 시름이 있는 것인가.

보옥은 문득 소홍이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가가서 말을 걸어볼까 하고 있는데 벽흔이 불쑥 나타나 소리를 높였다.

"아이구, 도련님, 여기 와 계시면 어떡해요.

세숫물 떠 놓았는데"

벽흔은 소홍 쪽을 흘끗 쳐다보고 나서 쓴웃음을 흘렸다.

소홍은 기겁을 하여 다시 장작 정돈하는 일을 하고 보옥은 벽흔을 따라
방으로 돌아왔다.

보옥은 벽흔의 뒤통수를 노려보면서, 아유 저것들만 없으면, 하고
속으로 이를 갈았다.

습인이 무엌 뒷문을 열고 나오더니 소홍을 불렀다.

"소홍아, 너 얼른 대옥 아가씨한테 가서 타구를 하나 빌려 오렴.

여기 타구들은 어떻게 된 판인지 잘 깨어지고 아무리 닦아도
깨끗해지지가 않아.

깨끗하고 튼튼한 걸로 하나 빌려 와"

"그러죠"

소홍은 두 손을 비벼 털고는 대옥이 있는 소상관 쪽으로 향했다.

소홍이 취연교를 지나며 바라보니 소산 꼭대기에 바람막이 무명천이
허옇게 빙 둘러 쳐져 있었다.

거기서 나무 심는 공사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인부들이 여기저기서 구덩이를 파고 있고 가운이 돌 위에 걸터앉아
그 인부들을 감독하고 있었다.

어제 꿈속에서 본 그 가운이 아닌가.

무언가를 지시하기 위해 가리키는 저 손도 꿈속에서 보지 않았던가.

소홍은 꿈속에서 가운이 자기 손을 덥석 잡던 장면을 떠올리며 얼굴이
귀밑까지 발그레해졌다.

오늘 저분을 보려고 어제 그런 꿈을 꾸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자 소홍은
가슴이 두근거려 견딜 수 없었다.

이런 감정은 소홍으로서는 생전 처음 느껴보는 셈이었다.

그 순간에는 저런 사람의 마음에 들어 팔자를 고쳐 볼까하는 이해
타산적인 생각 따위는 온데간데 없었다.

아, 이런걸 사랑이라고 하나.

소홍은 누가 자기 마음을 들여다볼까 싶어 걸음을 빨리 하여 취연교를
건너 소상관으로 달려갔다.

대옥에게서 타구 하나를 빌려 가지고 다시 취연교를 건너오면서 소홍은
어쩔 수 없이 또 소산 쪽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인부들은 열심히 구덩이를 파고 있고 가운은 왔다갔다 하며
인부들을 독려하고 있었다.

인부들보다 머리 하나가 더 커 보이는 가운은 풍채가 의젓하고 멋들어
졌다.

정말 저분이 내 손을 한번 잡아준다면.

소홍은 꿈속에서의 일이 현실에서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소원하였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2월 2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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