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공단에서 컴퓨터부품을 제조하고 있는 C사 김모사장은 지난해부터
삼성이 현금결제를 시작하면서 대기업들이 잇달아 40-45일짜리 어음결제를
해주고 있어 이전에 통상 3개월짜리 어음을 받던 시절에 비하면 훨씬 살맛이
난다고 말한다.

할인되지도않는 장기어음을 들고 사채시장을 뛰어다니지 않아도 되는데다
다소나마 부도의 악몽에서 벗어날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여전히 걱정은 많다.

현금결제분만큼 여타경영부분의 코스트를 줄여 납품가격을 낮춰 달라는
압력이 공공연히 들어오기 때문이다.

일부 대기업의 경우 단기어음결제를 이유로 납품가격을 깎고 있다.

김사장은 거래업체들이 올들어서 경영합리화를 내걸고 납품가격인하를
요구하고 있어 인건비는 오르는데 어떻게 단가를 낮춰야할지 막막하다고
밝힌다.

그렇다고 거래업체들의 이같은 요구를 무시할수도 없는 것이 하도급업체의
실정이다.

모기업과 하도급관계인 수급업체는 상호보완, 공존공생해야 되는데도
일방적인 관계만이 요구되고 있다.

기협중앙회가 최근 종업원 3백명미만의 전국중소기업 4천4백개를 대상으로
실태조사한 바에 따르면 전체의 절반인 48.9%가 도급만 받거나 도급을 주고
받는 수급업체이다.

이들 수급업체는 거래애로사항(복수질문)으로 73.1%가 저렴한 납품단가를
꼽고 있어 가격이 가장 큰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다음으로 대금결제일 장기화(47.8%), 불규칙한 발주(40%), 납기단축촉박
(34.4%)등도 애로점으로 꼽았다.

또 지나친 품질수준요구(28.9%), 거래선변경가능성(27.5%)등의 순으로
나타나 모기업과 수급기업과의 관계가 얼마나 일방적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대기업들이 중소기업을 육성한다고 발표하지만 막상 실무관계자들을 만나면
여전히 실무부서의 경영합리화 실적을 채우기위해 납품업체에 출혈할인을
강요하고 있다고 푸념한다.

지난해말에는 중소기업지원책을 발표했던 L그룹 산하 계열사에서
엘리베이터부품을 생산하는 납품업체에 원가절감운동을 편다면서 납품가격을
5% 깎겠다고 통보해 반발을 샀다.

이 사건은 여론의 화살을 맞으면서 L사에서 삭감방침을 철회해 일단락
됐지만 비일비재하게 벌어지고 있는 모기업 횡포의 한 단면에 불과하다.

S전자에 가전부품을 납품하는 수원의 중소기업사장은 이때문에 대기업납품
은 사실 빛좋은 개살구라고 말한다.

고정납품물량이 있어 공장은 돌아가고 결제조건이 좋아 부도는 안나지만
원가절감을 이유로 해마다 가격을 깎이는데다 반대로 인건비는 오르기
때문에 종업원월급주고나면 먹고 살만큼만 남는 월급쟁이 사장이라고 한다.

이런 현실에서 중소기업들이 어떻게 자생력을 갖고 신제품이나 신기술을
개발할수 있겠느냐고 개탄한다.

그나마 대기업거래 업체들은 그래도 형편이 좋은 편이다.

수급업체의 2차수급을 하는 영세중소업체는 장기어음결제와 낮은 납품가격,
거래불안의 어려움을 감수해야 한다.

기협의 같은 조사에서 수급업체들의 거래유형을 보면 대기업과 거래를 하고
있는 기업은 20.8%이고 절반인 52.1%가 중소기업과 수급거래를 하고 있다.

수급거래별로는 30.8%가 2차수급업체로 나타났고 3차수급이상도 7.8%에
달한다.

이들 2,3차수급업체의 경우 설혹 부당한 대우를 받더라도 하소연마저
못하고 있다.

하도급업체의 어려움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대부분의 하도급업체는 원료를 대기업으로부터 구매, 가공후에 다시
모기업에 납품하는 생산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들 기업들이 대기업들로부터 철강재나 원사 화학원료등 기초원료를 구매
할때도 역시 허리를 굽혀야 한다.

중소기업이다보니 단위구매물량이 적어 홀대받고 현금을 주고 사야 하며
어음결제는 생각도 못한다.

성수기에는 원자재를 시중에서 웃돈 주고도 사기 힘들 지경이다.

인천에서 프레스금형업체를 하는 이모사장은 대기업에서 현금으로 어렵게
원자재를 사다가 제품만들고 납품대금은 6개월짜리 어음으로 받고 사는
중소기업신세가 말그대로 샌드위치라고 말한다.

기협중앙회 대기업협력업무부 박용태과장은 하도급문제의 해결은 우선
가장 기본인 하도급거래공정화에 관한 법률에 명기된 어음기한인 2개월이
제대로 지켜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 다음은 모기업의 기술지원이 뒤따라야 한다고 지적한다.

기협계열화지도과 이영삼대리는 납품 가격인하 갈등 역시 기술개발을 통한
생산성향상으로 흡수해야 한다고 진단한다.

이를 위해서는 대기업들이 도급업체들의 애로기술해결을 적극 지원해
주어야 한다.

수급업체에 대한 기술개발지원없이 납품가격인하만 강행하다 보면 수급
업체들의 영세화가 심화될수밖에 없고 이는 결국 대기업 스스로의 제품
경쟁력을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또 정부차원에서도 도급업체가 수급업체의 기술개발을 지원하는 자금에
대해 세제혜택을 주거나 비용인정을 해주는 등의 지원책이 마련돼야 한다고
업계관계자들은 입을 모으고 있다.

< 고지희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6년 2월 2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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