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씨에 대한 수뢰부분 첫 공판은 짐작 못한 일은 아니면서도 안팎의
시선을 모은 속에 파문을 던졌다.

역사 바로 세우기의 정당성까지 들먹인, 수뢰죄 기소에 대한 전피고 본인과
변호인단의 강도높은 항변은 한마디로 법치주의 착근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새삼 일깨운 산 역사의 현장으로 비쳐졌다.

재판부나 국민의 감정을 고려, 반박을 삼갔던 노태우씨 공판에 견주어
전씨 공판은 벽두부터 대조를 보였다.

수천억 수재를 뇌물아닌 정치자금이라고 한 완강한 항변은 형사 피고의
당연한 무죄주장 선을 넘는 느낌이었다.

마음속 두 전직 대통령의 구속과 형사재판 회부를 자랑스러워 하는 국민은
많지 않다.

적어도 수뢰 혐의에 대해선 되도록 고양된 애국심으로 국난을 수습하는
와중에서 일시적 오판으로 실정법을 저촉하는 결과가 됐으며 그것을
뉘우치는 그들의 진심이 공판에서 인정돼 가벼운 처분을 받길 바라는게
보통이다.

물론 전씨가 여러 면에서 노씨와 다르리란 점은 다수가 안다.

하지만 불행히 어제 공판에서 그의 솔직 대범한 측면보다는 무모 저돌적
이라는 측면이 더 많이 노출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첫째 과감하달 정도로 무딘 법 감정이다.

2,000 몇 백억원이 어찌 그리 하찮은가.

액수를 불문하고 정치자금이면 정당하다는 듯 과연 항변이 그리도 당당할
수 있는 것인가.

직무를 위해선 예산외 자금수취되 적법이라 믿은 것이 진심인가.

만일 그런 수준의 법 의식을 가지고 법치국가 수반을 자처했다면 그것이
이미 불행의 첫발이었다.

둘째 통치라는 개념의 발상과 무저항적 통용이다.

국방-외교상 비상적으로 용인되는 국가원수의 긴급적 권한이 초법적으로
과잉 해석, 확산되어 전-노씨가 재판정에서 애용함은 아이러니다.

셋째 통 큼, 즉 대범성을 무분별하게 미덕시하는 경향이다.

남성우월 무법인치 시대의 뿌리깊은 유산으로, 양면은 있다.

가령 기왕지사 저질러진 잘못을 전직 국가 원수다운 당당한 태도로 시인
하고 부당한 것은 항변도 하는 태도는 미덕일수 있다.

그러나 작으나 크나 준법을 선양해야 하는 민주체제 아래에선 실익보다
부작용이 많은 덕목이다.

이런 정리끝에 우리는 앞으로 공판에 임할 바람직한 방향이 어떤 것인지
전씨 스스로도 터득할수 있으리라 믿는다.

기본적으로는 그가 지나친 자신감, 망상에 가까운 자존을 삼가며
그럼으로써 마음속에서 자신의 잘 잘못을 분명히 가리는 일부터 해야 한다.

아무리 뛰어난 영걸도 과오란 있는 법, 스스로를 무류라고 믿을 만큼
전씨가 몽매하다고는 보지 않는다.

그리고 그 첫째 징표는 검찰-재판부의 신문에 사실 그대로를 밝히는데서
나타나야 한다.

그것이 파렴치범과 구별되는 유일의 방법이며 국가에 충성이기도 한
것이다.

전씨가 비자금-쿠데타 관련 일련의 공판에서 그의 덕성을 살려 노씨에
수범이 됨은 물론 국민에게 감명을 주도록 정직하고 당당함으로 일관한다면
그가 국민과 역사에 끼친 수치를 보상하고도 남을 것이라 확신한다.

비자금사용처 등 모든 것을 밝히라.

(한국경제신문 1996년 2월 2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