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앵앵은 어머니의 권유로 다른 남자와 혼례를 치르고 출가를
하게 되었다.

장생은 그 소식을 듣고 아직도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공부는 뒷전으로 미룬 채 술로 나날을 보내었다.

그러다가 결국 과거시험을 포기하고 어느 여자와 결혼하여 고향이
아닌 다른 지방을 떠돌며 그저 하나의 범부로 살게 되었다.

세월이 한참 지난 후, 장생은 고향으로 내려가서 앵앵을 만나보려고
하였다.

이미 남의 아내가 되어 있는 여자를 만나려면 먼저 그 남편의 허락을
받는 것이 순서라고 생각한 장생은 지방 관리로 있는 앵앵의 남편을
찾아갔다.

앵앵의 남편을 주막으로 데리고 간 장생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의남매를 맺은 사이이긴 하나 워낙 생업에 쫓기다 보니 동생을
만나본 지도 오래 되는군요.

한번 만나볼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해주시오"

"아, 그거야 내가 허락을 하고 안 하고 할 성질의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동생을 만나는 일인데. 나는 괘념치 말고 동생을 만나보도록 하시오.

내가 옆에 있으면 하고 싶은 이야기도 다 못나눌 테니 둘이서 따로
만나도록 하시오.

내일 아침 강가 춘풍정으로 아내를 내보내겠소"

앵앵의 남편은 흔쾌히 허락을 해주었다.

장생은 다음 날 아침 의관을 차려입고 강가로 나가 춘풍정 아래에서
앵앵을 기다렸다.

마침 봄기운이 완연한 날씨라 춘풍정이라는 그 정자 주변에는 물 오른
수양버들이 봄바람에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그 너울너울 흔들리는 수양버들 가지들을 바라보며 장생은 치렁한
앵앵의 검은 머리를 떠올렸다.

장생이 앵앵을 처음 안던 날 밤,앵앵이 고개를 숙이고 살며시 비녀를
뽑자 머리칼이 위에서부터 물결처럼 출렁이며 내려오지 않았던가.

조금 있으면 나타날 앵앵의 모습을 눈 앞에 그려보니 장생은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그래서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내쉬었다 하며 춘풍정 주변을 초조하게
서성거렸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앵앵은 나타나지 않았다.

한참 만에 저쪽 강둑에서 여자 하나가 바삐 걸어오고 있었다.

앵앵인가 싶어 장생이 달려가 보았으나 그 여자는 앵앵이 아니라 앵앵이
보낸 시녀였다.

시녀는 시가 든 봉투 하나를 장생에게 내밀고는 총총히 돌아갔다.

장생은 그 봉투를 열어볼 엄두가 나지 않아 그것을 집으로 가지고 와서
자기 방에 들어가 가만히 열어보았다.

님이 떠나간 후 햇빛은 나에게서 사라졌네
밤마다 전전반측 잠 못 이루었네
어느새 세월은 흘러 몸은 늙어가고
이 늙은 모습 님에게 다시 보이지 않으려네

(한국경제신문 1996년 2월 2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