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옥이 이향원 담장을 막 벗어나려 할 즈음 또 한 구절의 노래 가사가
들려왔다.

그대는 구석진 규방에서 홀로 슬퍼하도다 그 가사를 듣자 연극 내용이
어떠할지 짐작이 되고 조금 전에 들은 가사의 의미도 좀 더 분명해졌다.

아리따운 여자가 청상과부나 독신으로 독수공방을 하며 시름에 젖는
내용일 것이었다.

아리따운 여자는 그 아름다움이 남자가 있을 때 더욱 빛을 발하는
법인데 흐르는 세월을 따라 꽃다운 청춘이 허무하게 지나가고만 있으니
안타까운 노릇이었다.

연극의 앞부분은 그 여자가 어떤 연유로 혼자 사는 여자가 되었느냐
하는 줄거리일 것이 뻔하였다.

대옥은 손에 들린 "서상기"를 내려다보았다.

아까 조금 읽어본 바로는 "서상기" 역시 남녀의 사랑과 이별을 줄거리로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대옥은 빨리 방으로 돌아가서 그 책을 읽어보고
싶은 마음에 걸음을 재촉하였다.

대옥이 방으로 돌아오니 희봉이 선물로 보낸 상등차 두 병이 놓여
있었다.

대옥은 그 차의 향긋한 냄새를 한번 맡아보고 난 후 침대에 엎드려
"서상기"를 읽어나갔다.

정씨 부인의 사연을 들은 장생은 마침 그 지역 반란군의 우두머리와
전부터 친분관계가 있던 터라 그 우두머리를 만나 정씨 부인의 집안만은
건드리지 말아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리하여 정씨 부인의 집안은 그 난리 중에도 무사하게 되었는데,
정씨는 장생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그를 집으로 초대하여 큰 잔치를
벌였다.

그러면서 자식 둘을 그에게 소개하였다.

하나는 열 살이 된 환랑이라는 사내아이였고, 또 하나는 열일곱 살 난
앵앵이라는 처녀였다.

정씨는 앵앵에게 장생을 오라버니처럼 모시라고 일렀다.

장생은 앵앵을 보는 순간 신비로울 정도로 아름다운 그 모습에 정신이
다 나가버렸다.

여간해서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장생이었지만 앵앵 앞에서는
맥을 추지 못했다.

보구사라는 절에 얼마간 더 있다가 집으로 돌아온 장생의 눈앞에는
자나 깨나 앵앵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장생은 결국 앵앵에게 그녀를 사모하는 자신의 마음을 전하기로 하고
"춘가"라는 제목의 시를 지어 정씨 부인 집 하녀로 하여금 그 시를
앵앵에게 전달해주도록 하였다.

단 한번 본 그대의 모습
봄날의 아지랑이 같이
내 마음의 뜨락에서 끝없이 아른거리네
내가 무엇을 보고 왔는가
이 세상 사람을 보고 왔는가
저 세상 혼령을 보고 왔는가


(한국경제신문 1996년 2월 1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