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무르익은 삼월 중순 어느날 보옥은 "서상기"라는 연극 대본을
들고 심방갑 근처로 나갔다.

그곳은 다른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이라 일종의 금서에
해당하는 그런 책을 읽기에 적합한 장소였다.

보옥은 누가 근처에 없나 한번 휘 둘러본 후 평평한 돌 하나를 골라
그 위에 앉았다.

그 주위로는 복사꽃이 만발하여 꽃잎들을 흩날리고 있었다.

보옥은 그렇게 복사꽃 꽃비를 맞으며 "서상기"를 펼쳐 읽기 시작했다.

"서상기"는 당나라 원진이 지은 단편소설 "앵앵전"을 기초로 원나라때
왕실보가 각색한 가극이었다.

일명 "회진기"라고도 하였다.

장생이라는 젊은이와 앵앵이라는 소녀 사이의 애틋한 사랑을 그 내용
으로 하고 있었다.

그 사랑은 일생동안 이어졌으나 현실적으로 맺어지지는 못했다.

장생은 준수한 용모로 예의범절에 어긋나는 행동을 몹시 싫어하는
성미였다.

호탕한 친구들이 장생의 동정을 떼어주려고 술집이나 기생집으로
데려가서 여러가지 계교를 부렸으나 끝내 몸가짐을 흩뜨리지 않았다.

아무리 장생에게 술을 잔뜩 먹여 취하게 한 후에 여자를 붙여주어도
여자를 건드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장생은 나이 스물세살이 되었어도 여전히 숫총각인 채로 있어
늘 친구들의 놀림감이 되었다.

장생의 나이 스물세살이 되던 바로 그해, 그는 포라는 곳에서 동쪽으로
10리쯤 떨어진 보구사라는 절에 한동안 머물렀다.

그때 그 지방 도독 혼감이 세상을 떠나자 평소에 관헌들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던 군사들이 반란을 일으켜 관헌의 집이든 백성들의 집이든
닥치는대로 약탈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 정씨 성을 가진 미망인이 그 난리를 피해 보구사에 와서
집안의 안전을 위해 부처님의 가피를 빌고 있었다.

몇해 전에 죽은 그 여인의 남편은 최씨였는데 지방 유지로 큰 부자였기
때문에 군사들의 약탈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루는 장생이 붉은 꽃잎이 난분분히 떨어져 무더기를 이루고 있는
절간 뒤뜰에 앉아 있으려니 정씨 부인이 시름에 젖은 얼굴로 다가왔다.

보옥이 이 구절을 읽고 있는데,그 대목과 마찬가지로 바람이 휙 불면서
복사꽃 꽃잎들이 무더기로 책 위에 쏟아져 내렸다.

보옥은 그 꽃잎들을 털어버리고 책을 계속 읽어나가려 하다가 꽃잎들이
그냥 발에 밟혀 으깨어지는 것이 안쓰러워 그 꽃잎들을 옷자락에 담아
가지고 시내로 내려가 물에다 띄워주었다.

꽃잎들은 물살을 따라 빙글빙글 돌다가 점점이 심방갑 쪽으로 흘러갔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2월 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