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정식 <한양대 경제학과 교수>


남태평양의 미국 보호령인 얍(Yap)이라고 불리는 섬에는 지금도 소액거래는
달러를, 거액거래에는 도넛 모양의 석회석 돌 돈을 사용하고 있다.

현명하게도 그들은 상거래시 아주 큰 돌 돈은 말로만 주고받는다고 한다.

교회당 마당에 놓여있는 지름 2m짜리 돌 돈의 임자가 카누를 샀다면 그
돌이 카누를 판 사람의 것이라고 여러 사람 앞에서 말하면 된다.

재미있는 것은 그 섬의 한 할아버지가 마을 사람들과 함께 무인도에 가서
큰 돌을 다듬어 가지고 오는 중에 카누가 뒤집혀 그만 물속에 빠뜨렸다고
하는데 그 돌 돈은 지금도 돈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무인도에 같이 갔던 사람들 모두 그 돌 돈이 얼마나 큰 것인지 알고 있고
어차피 큰 돌 돈은 한 곳에 놓아두고 말로만 주고받는 것이므로 교회당
마당에 놓여 있건 바다 밑에 놓여있건 상관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지난 수천년간 우리 인간은 돈을 조개 금 은등 실물 가치를 가진 물품으로
인식해 왔다.

근세에 들어 공신력을 가진 은행과 강력한 정부가 출현함에 따라 비록
실물 가치는 없지만 적어도 종이라는 실물 형태를 가진 수표나 지폐가
화폐 기능을 수행해 왔다.

은행도 예전에는 웅장한 건물과 철통같은 금고를 고객들이 바라보게 하며
공신력을 과시했다.

언뜻 보면 21세기 문턱에 들어서고 있는 지금 바다 밑 바닥에 놓여있는
돌을 돈으로 주고받는 얍 섬 사람들의 돈에 대한 관습은 매우 우습고
황당하기까지 하다.

그런데 지금 우리 앞에 나타나고 있는 전자화폐나 가상은행은 바다밑에
놓여있는 얍섬 사람들의 돌 돈 보다 훨씬 더 황당한 것이다.

전자화폐는 컴퓨터 기록장치 마그네틱 테이프나 광디스크에 저장된
디지털부호에 불과하고 인터넷 가상은행의 송금은 전자부호를 보내는
것뿐이다.

이제 실물 형태도 없는 즉 하드웨어 특성을 상실하고 소프트웨어 특성만을
가진 디지털 부호로 된 돈과 그림으로만 나타나는 가상은행과 거래해야하는
시대가 오고 있다.

바다 밑에 있는 돌 돈은 실체를 눈으로 확인해 볼 수 있지만 컴퓨터
디스크에 저장된 돈이나 가상은행 사이의 송금은 눈으로 확인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얍섬 사람들이 바다 밑에 있는 돌 돈을 믿는
것보다 더욱 확실하게 돈이 은행금고(계좌)에 있고 또 볼 수는 없는 돈을
주고받는다고 믿어야 하는 시대가 오고 있다.

이는 일반인들에게는 대단히 큰 문화적 충격이다.

인간은 오관으로 인식할 수 있는 것만을 믿고자 하는 성향이 있는데
오관으로 인식할 수 없는 디지털 부호를 돈과 은행으로 믿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전자금융의 성패는 이같은 문화적 충격을 극복하는 것인데 전자화폐와
가상은행이 공신력을 확보하는 것이 우선 과제이다.

불행히도 아직은 컴퓨터 해커가 금융전산망에 침입해 전산망을 와해시키고
개인용 전자지갑에서 돈을 꺼내 갈 위험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전자금융시대에 금융기관들이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은 기술혁신을
통해 고객의 재산을 해커들로부터 완벽하게 보호관리하는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다.

또한 전자금융시대에 고객의 금융재산은 데이터베이스 즉 정보형태로
보존되는데 그것이 누출되면 범죄에도 악용될 수 있으며 사생활(privacy)
보호에도 커다란 지장을 초래할 수 있다.

그러므로 금융기관이 부당한 금융정보 누출을 방지할 장치를 마련하는
것도 문화적 충격을 극복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2월 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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