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옥이 거처하는 이홍원 앞으로는 맑은 시내가 흐르고 그 시내 위에는
취연교가 놓여 있었다.

취연이라는 말이 뜻하듯이 그 다리 앞쪽에 솟아 있는 조산 나무숲
사이에서 안개가 피어오르면 그 다리는 그야말로 푸르스름한 연기에
휩싸이는 듯했다.

보옥은 창 너머로 시내와 다리, 소산이라 이름이 붙여진 그 조산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자기도 모르게 시상이 떠오르곤 하였다.

소산 너머 운보석제라는 돌층계가 있고, 그 운보석제를 지나면 대옥이
거처하는 소상관이 있었다.

그 소상관은 보옥이 창문만 열면 바로 건너다보이기 때문에 늘 대옥이
생각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보옥은 어느 날 밤, 지금쯤 이불 속에 들어가 있을 대옥을 떠올리며
시를 한 수 지었다.

시의 제목은 춘야즉사운 이었다.

봄밤에 이것저것 생각한다는 뜻이었다.

붉은 비단 휘장 안에 이부자리 펴고 누우니
멀리서 아련히 들려오는 개구리 울음소리
창 밖에는 비가 내리고 베개는 차가워라
봄빛이 눈앞에서꿈속인 양 어른거리고
그리운 이의 모습도 거기 보이네
저 촛불은 누구 때문에 저리 눈물을 흘리나
꽃들은 말없이 근심하며 나를 나무라네
어린 시녀는 게으르지만 애교는 넘쳐
웃음 참지 못해 이불을 덮어쓰고 키득거리네

봄날 밤에 시녀와 함께 한 이불 속에서 노닥거리면서도 그리운 여인을
생각하는 심정을 노래한 시인 셈이었다.

시를 짓고 나니 정말로 시녀라도 하나 불러들여 이불 속에서 몸을
비비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관원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부터 시녀들과 잠자리
에서 어울린다는 소문이라도 나면 아버지 가정이 회초리를 들고 와서
쫓아낼지도 몰랐다.

보옥은 자신의 욕정을 억누르느라 몸을 뒤치며 잠을 잘 이루지 못했다.

날이 밝아 보옥이 밖으로 나가니 아침부터 산책을 나온 누이들이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그 누이들은 보옥처럼 수시로 시를 짓기도 하고, 책을 읽다가 싫증이
나면 거문고를 타기도 하고,장기를 두거나 수를 놓기도 하였다.

어떤 때는 여럿이 모여 수수께끼 놀이를 한다고 법석을 떨기도 하였다.

무엇보다 대관원에서는 집안 어른들이 눈에 띄지 않으니 여자 아이들과
보옥이 마음껏 뛰놀 수가 있어 좋았다.

물론 이환같이 나이가 든 여자도 있어 아이들의 상황을 수시로 집안
어른들에게 보고를 하고 있긴 하였다.

하지만 초록은 동색이라고 이환이 그렇게 나쁘게 보고할 리가 없었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2월 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