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가 21세기 주역이 될 것이라는 전망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로 받아
들여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외교행태는 ''유럽위주''의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게 앨빈 토플러 같은 미래학자의 평가다.

토플러박사는 지난해 APEC회의에 참석키로 돼있던 클린턴이 국내문제를
이유로 일방적으로 이를 취소해 버리고 해묵은 북아일랜드 문제를 다루기
위해 곧바로 유럽방문길에 오른 것은 백악관의 세계전략부재를 드러낸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최근 백악관의 외교전략전반에 걸친 평가를 주 내용으로 한국경제신문에
독점 기고한 토플러박사의 글을 게재한다.

< 편집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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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악관은 메테르니히(19세기 오스트리아 총리)보다 마돈나에 더 친숙하다.

유럽의 역사에는 눈이 어두우면서도 미국 대중문화 동향은 잘 파악하고
있다는 얘기다.

때문에 미국의 세계전략에는 장기적인 목적의식이 결여되어 있고,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지적도 받는다.

백악관 관리들은 아이티 북아일랜드 그리고 최근에는 보스니아의 예를
거론하면서 클린턴이 세계 지도자로 떠올랐다고 떠들어댄다.

그들은 이스라엘 라빈총리 장례식에 참석한 클린턴이 안목을 갖고 있다고
확신한다.

또 그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세력을 결집해 나가고 있다고 믿는다.

이들이 믿는 바가 대체로 맞을 수도 있고 맞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세계지도자로서의 클린턴의 약점이 드러난다.

전략이란 지향하는바가 명백하고 미리 계획된 것이다.

다시말해 곰곰이 따져 목표를 정한뒤 이를 달성하기 위해 자원을 활용하는
의식적인 계획이 전략이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클린턴의 결정에서는 전략을 찾을수 없다.

클린턴에게 보스니아문제는 정치적으로나 쓸모있는 일시적인 사안에 불과
하다.

그는 결국 보스니아에 미군을 파견했다.

그러나 이 결정을 내린 바로 그 대통령이 2년전에는 "보스니아문제에
대해서는 단 1분도 낭비하지 않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

앞뒤가 맞지 않는다.

전략이 암시적이고 비계획적이고 무의식적으로 선택된 어떤 것을 의미
한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이런 의미에서라면 백악관은 임기응변적이긴 하나 전략을 갖고 있는
셈이다.

이 전략은 클린턴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채 집행돼 왔다.

클린턴의 보스니아 파병 결정은 유럽편향적 정책의 심화를 의미한다.

또한 세계에서 가장 빨리 성장하고 가장 중요한 정치.경제.군사적 요충지인
아시아에 대한 미국의 관심과 지위가 약화되고 있음을 뜻한다.

보스니아 파병 결정을 발표한뒤 2주일만에 미국과 유럽연합(EU)관리들은
브뤼셀에서 미국과 유럽의 유대를 더욱 확고히 하기 위해 교육에서부터
질병치료 마약규제 상표부착등에 이르기까지 1백30여분야에서 일반협정및
행동원칙을 만드는데 합의했다.

클린턴행정부의 업적 한가지는 전바르샤바조약기구 국가들을 포용하기
위한 NATO의 확대였다.

그러나 이렇게 확장된 NATO가 유럽대륙은 차치하고라도 보스니아에서 평화
를 유지하는데 얼마나 효과적이었는지 의문스럽다.

미국이 유럽과 긴밀한 관계를 맺는 것은 필수적이다.

그러나 클린턴이 포용하려 하는 유럽은 미국의 2배에 달하는 실업률로
고전하고 있다.

그동안 각국 기업과 정부는 계급조직과 같은 위계질서를 무너뜨리고
관료주의를 타파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반면 EU는 15개의 국가조직 위에 또하나의 조직을 만들어 더욱 수직화됐다.

유럽은 규모의 경제를 실현한다는 뒤떨어진 관념하에 경제통화통합에 주력
하고 있으나 예상만큼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최근 프랑스의 파업에서 분명히 드러났듯이 공공부문의 반발도 만만치
않다.

미국과 일본은 선두에 서서 달려가고 있다.

반면 유럽은 레스터 서로 교수등이 예상한대로 경제경쟁에서 뒤지고
정치적으로 곤경에 처해 있다.

이는 유럽 각국이 지난 수십년간 농업분야에 수십억달러를 쏟아붓는동안
첨단산업계가 자금난에 허덕였기 때문이다.

워싱턴에 있는 "진보와 자유 재단"의 마이클 블라호스는 세계 컴퓨터시장
에서 유럽국가들이 점유하는 비율이 7%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유럽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는 5종류의 컴퓨터 가운데 유럽에서 생산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

유럽은 국제교역에서 중요성이 갈수록 커지고 있는 영화 TV 멀티미디어
분야는 물론 통신 전자 인체공학등 미래의 산업으로 꼽히는 모든 분야에서
뒤지고 있다.

"제3의 물결"은 정보혁명이다.

이 혁명의 선봉장인 미국에서는 지난 76년부터 90년까지 고용이 33% 증가
했다.

유럽에서는 8% 늘어나는데 그쳤다.

게다가 이 가운데 97%는 공공부문이었다고 블라호스는 지적한다.

"제3의 물결"은 지난 3백년동안 가장 중요하고 역사적인 변화였다.

그런데 과거지향적인 유럽 지도자들은 경제 사회의 정보화를 무시했다.

유럽은 "제1의 물결"인 농업에 돈을 낭비했으며 초기의 "제3의 물결" 분야
를 소홀히 했다.

그 바람에 지금에야 "제2의 물결"인 제조업의 일자리를 찾아 "세계속의
방글라데시"로 떠나는 것을 도리없이 쳐다보고 있다.

유럽은 반드시 돌아올 것이다.

그러나 이는 오랜 시일이 걸리고 쉽지도 않을 것이다.

이것을 지구의 반대편에서 진행되고 있는 변화와 비교해 보라.

아시아인들은 분명 유럽인들이 하지 않은 일들을 해왔다.

일본이 그랬고 싱가포르 대만 말레이시아가 그랬다.

최근에는 중국도 가세했다.

이들은 의식적으로 "제3의 물결"을 추구해 왔다.

이들은 "제3의 물결"에 의해 창출되는 새로운 형태의 부를 최대한 차지하기
위해 경쟁을 벌였다.

이것은 금융위기와 부동산의 거품으로부터 일본을 구제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일본은 "제3의 물결"을 맨먼저 제조업에 체계적으로 활용함으로써
전혀 다른 형태의 제품, 최고 품질의 제품을 생산할수 있게 됐다.

일본은 순식간에 무에서 경제초강대국으로 부상했다.

또 막대한 자본을 아시아국가들에 투자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이들을
자극했다.

이 무렵 싱가포르에서는 이광요총리가 의식적으로 계획을 세워 도시국가를
정보 통신 금융및 지식 서비스에 기초한 "제3의 물결"의 경제모델로
탈바꿈시켰다.

이제 싱가포르는 중국 내륙의 특구에 닮은꼴(클론)을 만들려고 한다.

말레이시아도 싱가포르 모델에서 많은 부분을 채택했다.

아태경제협력체(APEC) 18개 회원국은 최근 세번째 모임을 가졌다.

중국 일본 한국 싱가포르는 물론 캐나다 미국 멕시코 칠레등을 포함하는
이 조직은 세계 인구의 38%를 차지하며 국민총생산(GNP) 합계는 14조달러
이다.

세계무역 점유율은 56%에 달한다.

집계방식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지만 미국과 아태지역국가들의 교역량은
미국-유럽간의 교역량보다 50%나 많다.

APEC는 세계에서 성장속도가 가장 빠른 지역이며 주요 아시아국가들은
대부분 연구개발에 엄청난 돈을 투자하고 있다.

세계의 경제력은 유럽과 대서양지역에서 아태지역으로 이동하고 있다.

이에 대해 클린턴정부는 어떻게 대처해 왔는가.

클린턴정부는 일본에 끊임없이 통상압력을 가했다.

"국익"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표를 미끼로 내건 이익집단이나 선거운동원들의 이익을 위해서였다.

일본이 미국쌀 한톨을 산다고 치자.

이것이 과연 미국 국익에 얼마나 도움이 되겠는가.

그런데도 미국정부(이 문제에 관한한 이전의 공화당정부)는 일본인들에게
미국쌀을 사도록 압력을 가했다.

그 결과 오랫동안 친미정책을 펼쳐온 일본의 집권 자민당이 쌀재배농가의
지지를 잃고 말았다.

클린턴은 디트로이트의 자동차업계와 사육농가및 다른 많은 이익집단들의
요구도 받아들였다.

이 가운데 반도체 통신업계의 요구를 수용한것 정도가 장기적으로 국익에
유익하다고 할만하다.

대부분의 아시아국가들은 지역 안정을 위해 미일군사동맹에 의존해 왔다.

그런데 미국정부가 일본을 붙잡고 어리숙하고 비효율적인 무역전쟁을
벌이는 바람에 이 군사동맹이 위협을 받았다.

미국 금융계(월스트리트)가 도쿄의 금융위기 상황을 갑자기 우려하기 시작
하고 일본의 대형 투자펀드들이 미국에서 철수하기 시작할 때에야 클린턴
측근들은 압력을 중단했다.

이때까지 미국은 일본을 너무나 잘못 다루었다.

그 바람에 양국관계는 쌀쌀하게 식어버렸다.

설상가상으로 오키나와에서 세명의 미군이 12세의 일본소녀를 성폭행한
사건이 발생하면서 지난 60년대초이래 찾아볼 수 없었던 엄청난 반미감정이
폭발했다.

반미 국수주의는 점증하고 있다.

또다른 반미감정이 조만간 촉발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번에는 한국에서다.

한국 검찰은 비자금조사에 이어 80년5월의 광주학살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한국 군인들이 시민 2백명이상을 살육하는동안 미군이 수수방관만 하고
아무일도 하지 않았는지, 아니면 실질적인 공범인지 여부도 조사할 것이다.

클린턴의 세계지도력에는 광범위하게 전략이 결핍돼 있다.

전술 또한 서투르다.

하나만 예를 들겠다.

미일무역분쟁이 절정에 달했을때 미국은 중국과 일본을 싸우도록 함으로써
이익을 챙길수 있었다.

그러나 클린턴은 이런 정책을 택하지 않았다.

오히려 중국과 다른 아시아국가들을 일제히 공격하고 공공연히 모욕했다.

백악관에는 분할통치란 말을 들어본 사람이 없는 듯했다.

백악관이 이처럼 어리석게 행동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동서양의 문화적
차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데 있다.

미국정부는 자신의 행동이 체면을 중시하는 아시아인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생각하지 않았다.

클린턴이 오사카 APEC 정상회담에 참석해 일본총리와 만나려던 계획을
갑자기 취소한 것도 이같은 무지에서 비롯됐다.

클린턴은 부랴부랴 미일정상회담 일정을 96년1월로 연기했다.

그리고는 일본 입장은 생각하지도 않고 이 일정마저 취소했으며 4월까지는
아시아국가를 방문할수 없다고 발표했다.

그런 클린턴이 곧바로 런던 북아일랜드 등 유럽을 5일간 순방했다.

엘리자베스여왕도 만났다.

아시아국가들은 자기들을 무시하는 듯한 그의 이같은 행동을 빠짐없이
지켜보았다.

클린턴의 이런 행위로 미국이 아시아에서 친구를 하나씩 잃어가고 있음이
재확인됐다.

미국이 아시아국가들을 적대국이나 다름없이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사실도 입증됐다.

이제 미국은 더이상 아시아지역에 신경쓰지 않고 "아시아인을 위한
아시아"로 남겨둔채 이곳을 떠나거나 떼밀려 나갈지 모른다는 가정이 확산
되고 있다.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 총리나 일본의 강경 국수주의자인 이시하라
신타로와 같은 강경론자들만이 이런 위험한 견해를 갖고 있는게 아니다.

중국 군부의 고위층에서는 더욱 심하다.

간단히 말해 거드름피우는 듯한 클린턴의 외교행태는 아시아국가들에 나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일본은 미국이 더이상 동맹국으로 필요하지 않거나 미국측이 동맹국으로
남기를 원치 않는다고 생각하게 됐다.

중국은 미국이 자기네를 억누르려고만 하며 경제발전을 막고 있다고 생각
한다.

한국은 미국이 북한의 핵잠재력을 제지할 마땅한 계획을 갖고 있지 않다고
판단하게 됐으며 다른 아시아 국가들은 미국이 아시아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고 확신하게 됐다.

이런 견해는 이 지역 국가들에 착오를 불러일으켜 언젠가는 태평양지역에서
새로운 분쟁을 초래할수 있다.

미국의 "세계 지도자"는 신중한 국제전략도 없이 무분별한 전략을 추구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폭넓은 토론도 없고 대중적인 논쟁도 없다.

심지어는 미국이 다른 선택을 할수 있다는 사실마저 인식되지 못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미국정부는 유럽에 치우친 역사적 결정을 하고 있다.

이런 결정은 미국은 물론 전세계 경제와 태평양의 평화를 위협할수 있다.

모든 사람들의 눈이 보스니아에 쏠려 있는 지금 미국에 해가되는 일들이
백악관내에서는 버젓이 벌어지고 있다.

< 정리=이창호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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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력 / 저서 ]]]

<>1928년 미 뉴욕에서 출생
<>1949년 뉴욕대 졸업
<>1957~58년 포천지 워싱턴특파원/편집장
<>1959~61년 미국 러셀문화재단 객원교수
<>1969년 코넬대 교수
<>주요저서 = ''미래의 충격'' ''제3의 물결'' ''미래학이란 무엇인가''
''권력이동''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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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제신문 1996년 1월 3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