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그 연원은 중국이다.

그 최초의 기록은 2600~3000년전에 쓰여진 중국의 "시경"에 나타난다.

"밭두둑에 외가 열렸다.

외를 깎아 저를 담자"라는 싯구다.

"저"는 김치를 뜻한다.

그뒤 김치의 기록은 "여씨춘추"와 "석명"에도 나온다.

또 한나라때의 "주례"에도 김치를 관리하는 관청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 미루어 볼때 한나라의 김치가 낙랑을 통해 한반도에 들어왔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삼국시대에 와서도 김치에 관한 기록은 없다.

다만 중국과 일본의 문헌들에서 그때의 식생활을 위촉해 볼수 있을뿐이다.

일본의 "정회원문서"와 "연희식"에는 쌀가루와 소금에 채소를 절인
순수보리지(단무지의 원조) 등의 기록이 나오고 서기500년의 중국식품서인
"제민요술"에는 그밖에 많은 종류의 김치가 설명되어 있다.

당시의 문화이전경로가 중국 한반도 일본이었던 점에 비추어 삼국에서는
김치를 식용했으리라고 짐작할뿐이다.

김치에 관한 기록은 고래중엽에 와서야 나타난다.

"무장아찌 여름철에 먹기 좋고 소금에 절인 순수 겨울 내내 반찬되네"라는
이규보의 시구는 무장아찌 무소금절이등의 김치가 있었음을 알려준다.

고려때의 문헌기록은 이것뿐이지만 일본의 "정창원문서"와 "연희식",
원나라때의 "거가필용" 등의 내용은 채소와 향신료를 섞은 김치가 고려때에
만들어졌음을 미루어 알수 있게 해준다.

조선조에 들어 와서도 여전히 김치는 채소를 소금물에 담그거나 향신료를
이용하여 담군 것이었다.

그것은 "음식디미방" (1670) "요록" (1600년대말) "산임경제" (1715) 등
문헌에 나타난다.

그러던 김치는 고추가루를 섞게 되면서 일대혁명이 일어난다.

고추 수입 이후 150여년이 지난 뒤의 일이다.

1760년의 "중보산림경제"에 첫 기록이 나온다.

당시에 총각김치 오이소박이 배추김치 동치미 가지김치 오이지 전복김치
굴김치 등으로 다양화된 김치는 1872년의 "임원십육지"에서 채소 향신료
해산물을 섞어 만드는 것으로 더욱 발전하여 거의 완성단계에 이르렀고
뒤로도 과일 육류 잣등을 첨가하는 정도의 개선이 있었다.

그 김치가 오늘날에는 한국의 고유식품으로서 세계의 식품이 된지 오래다.

조선조 중기에도 한국김치는 중국으로 전해져 사랑을 받았다는 기록이
"연행일기"(1712)나 " 산기정"(1803)에 나와 있을 만큼 중국이나 일본의
김치가 그 맛을 따를수 없었던게 사실이다.

그런데 애틀랜타올림픽의 김치공급권을 놓고 김치종주국인 한국이 일본의
도전을 받고 있다고 한다.

보다 적극적인 대처가 있어야 할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1월 1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