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에 대한 정부기능을 흔히 네가지로 설명한다.

경제개발을 기획하고 주도하는 기업가기능, 국민들의 경제행위를 규제하는
규제자기능, 틀을 정하고 이것을 잘 지키고 있는지를 심판하는 심판자기능,
그리고 교육 환경 사회보장 등을 제공하는 공급자기능 등이다.

후진국일수록 기업가기능과 규제자기능이 커지고 나라가 발전할수록
심판자기능과 공급자기능이 커져야 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90년대 들어 정부가 규제완화를 캐치프레이즈로 들고나온 것은 그러한
맥락에서 적절한 대응이었다.

그리고 나름대로의 노력도 기울였다.

그러나 약하게 잡아당긴 용수철이 제자리로 돌아가듯 규제완화의 실효성은
별로 나타나지 않고 있다.

왜 그런가.

그리고 왜 이 문제는 기필코 해결해야 하는 개혁과제인가.

거셴크론(A Gerschenkron)은 후진도가 깊을수록 경제발전에 있어서 정부의
기업가적 기능과 규제자적 기능이 커진다고 지적한바 있다.

다시 말하면 경제발전을 뒤늦게 시작하는 후발자일수록, 그리고 경제발전의
초기단계에 있는 나라일수록 정부의 규제자기능이 커지고 경제발전의
선발자일수록, 또 경제발전이 진전될수록 정부규제기능이 축소된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때 선발국이었던 영국은 자유방임하에서 산업혁명을
이룩했다.

그러나 그뒤를 이은 나라들을 보면 경제발전에 있어 정부의 규제기능은
영국보다는 미국, 미국보다는 일본, 그리고 일본보다는 한국에서 더 깊고
포괄적이었다.

후진도가 깊을수록 정부의 규제기능이 커지는 이유는 크게 두가지로 요약해
볼수 있다.

첫째로는 민간 섹터의 취약성이다.

자발적 저축능력이 부족하고 민간의 기업능력과 기술및 정보능력이 미흡
하기 때문에 정부가 이것을 직접 관여하고 통제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시장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시장실패현상이 지배하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는 것이다.

둘째로는 국가가 추구하는 성장목표가 후발국일수록 높다는 점이다.

높은 목표성장을 이룩하자면 생산요소와 자원을 우선순위 부문으로 집중
시킬수 밖에 없으며 그러자면 자원배분을 정부가 직접 교통정리할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런점에서 볼때 그동안 우리나라의 경제발전은 경제발전사상 정부규제적
성장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였다고 볼수 있다.

농업의 영세성으로 원시축적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강제저축과 외자도입이
불가피했으며 그런 환경아래서의 고도성장추구는 국민적 성장에너지를 우선
순위 산업과 수출드라이브 쪽으로 집증시키지 않을수 없었던 것이다.

요컨대 선발국들이 1백년에 걸쳐 해낸 일을 20년 또는 30년으로 단축해서
따라가려는 한국적인 압축성장은 개발초기에 정부규제적 발전이 불가피했음
을 함축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부규제적 구조가 관성화하고 경직화하며 경제발전의 진행
에도 불구하고 그 틀이 바뀌지 않고 있는데 문제가 있다.

새해 우리는 1만달러 소득시대에 들어선다.

이것은 우리 경제발전이 본격적인 성숙단계에 들어서서 선진국진입을 눈앞
에 두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경제의 정부규제현실은 예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진게 없다.

정부규제의 근거는 공공이익 물가안정 소비자보호 공정거래 행정편의 산업
육성등 광범하여 거의 모든 경제활동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예컨대 공장을 지으려 할때는 60여개의 법령이 규제하며, 1백개이상의
도장을 찍어야 했으며, 정부의 승인을 얻어야 하는 관허요금과 수수료만
해도 약5백가지에 이르렀다.

이러한 규제는 이제 성장효율과 도덕성이라는 양면에서 우리경제발전에
질곡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우리 경제의 민간섹터는 그 기반이 성숙했으며 더구나 세계화의 개방-경쟁
시대가 열리고 보니 규제경제에서 벗어나지 않고는 대외경쟁에서 살아남을수
없게 된것이다.

한편 경제 도덕성 측면에서도 정부규제에서 기인하는 정경유착과 부정부패
는 이 이상 우리사회에서 용납할수 없다는 사실이 그동안의 비자금사건을
통해서도 분명하게 되었다.

90년대 들어 규제완화 노력은 다방면에서 추진되었다.

91년에는 국무총리 직속기구로서 "행정규제완화 민간위원회"가 6개월간의
한시기구로 발족하여 모두 약6백건의 개선사항을 건의한바 있으며, 93년에는
"기업활동규제완화 특별조치법"을 개정하기도 했다.

이러한 조치를 통해서 적지않은 개선이 이루어 진것도 사실이다.

예컨대 은행의 제조업에 대한 대출비율 축소 또는 폐지, 인감증명 유효
기간연장, 운전면허시험 응시장소의 지역제한철폐, 중소기업들이 특정
유자격자를 고용해야 하는 법적 의무고용제도의 완화등을 열거할수 있다.

그러나 그동안의 성과는 지엽적인 문제일뿐 본질적인 문제에는 거의 손을
대지 못하고 있다.

이와같이 규제완화정책이 공전하는데는 두가지의 문제점을 지적할수 있다.

첫째로 규제완화에는 부처이기주의와 기득권층의 저항을 이겨내야 하는데
이를 이겨낼 개혁의지가 없었다는 점이다.

얽히고 설킨 금융규제를 풀지 못하는 것이나 당첨자에 프리미엄을 주고
있는 아파트분양가격을 자유화하지 못하는 것이 그러한 사례다.

다음으로는 행위규제는 풀고 원칙과 룰의 규제는 강화해야 하는데 이러한
정책적조화를 이룩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대기업문제에 대해서 여신규제, 전문화업종규제, 진입규제등
행위규제를 중심으로 규제하고 있는데 이것은 풀고 그대신 상호출자와
상호보증규제, 탈법적 세습규제 등을 강화해야 할것이다.

그리고 택지상한규제나 1가구1주택과 같은 직접 규제는 철폐하고 그대신
재산세강화를 통해 그 규제목적을 구현해야 할 것인데 이러한 정책조합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경제발전에 따라 정부규제는 줄여가야 할 부문도 있고 늘려가야 할 부문도
있다.

줄여가야 할 부문이 시장섹터이며 늘려가야할 부문이 바로 공공재섹터
이다.

공공재부문은 다음 세가지로 세분해 볼수 있다.

첫째 경제가 성장할수록 공급 비용이 체증하는 사회간접자본으로서 교통
환경 교육 토지문제등을 예로 들수 있다.

이것들은 개인적으로 해결할수 없는 공공재들인데 이것들을 가격기능에
맡길 경우 사회적 비용의 체증현상을 막을 길이 없다.

둘째는 사회복지 섹터로서 의료 위생 사회보장 등을 들수 있다.

이러한 복지공공재는 비용과 편익을 집단적으로 계량해야 할 분야다.

셋째로 국토개발의 균형과 효율을 위한 사항이다.

예컨대 우리나라의 수도권 인구집중은 교통난 주택난 환경난등 모든 문제의
근원이라 하겠는데 이러한 문제의 시정을 위한 정부규제는 더욱 강화돼야
할 것이다.

공공섹터와 관련하여 특히 문제되는 것은 이러한 공공재는 집단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것인데 우리나라에서는 개인적으로 해결하려고 한다는
점이다.

예를들면 맑은 물을 마시려면 수원의 오염을 막아야 하는데 그러한 노력은
소홀히 하고 그 대신 개개인의 수도꼭지에 정수기를 달아서 맑은 물을
마시려 하고 있다.

교육문제도 그러하다.

사회적교육투자에는 관심이 없고 개개인은 무거운 사교육비를 부담하고
있는데 그렇게 해서 자녀들에게 좋은 교육을 줄수 있겠는가.

교통-환경-의료-주거-노후복지 문제 등이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문제들이다.

그래서 선진국들의 저축이 조세나 사회보장기금과 같은 사회적 저축 중심
으로 이루어지고 있는데 반해서 우리나라의 저축은 개인저축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하여 선진국에서는 시장섹터에 대한 규제는 최소화하고 공공섹터에
대한 규제는 강화하고 있는데 우리는 그 반대의 길을 걸어온 것이다.

선후진국간의 차이를 극명하게 나타내주는 것은 사회를 움직이는 질서가
자율인가 타율인가 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나라는 자율 질서시대를 열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와 유사한 발전단계에 있는 나라들, 예컨대 싱가포르
말레이시아등 동남아 국가나 남미나라들을 보면 우리만큼 일상 생활과
생산활동이 정부규제에 얽매인 나라가 없다.

이와같은 한국경제의 타율적질서는 우리의 의식구조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자율질서를 기본으로 하는 경제는 불필요한 규제를 제거하되 필요한 규제는
자발적으로 준수하고 정부는 이를 엄격하게 관리한다.

그런데 우리는 그 반대의 편에 서있는 것이다.

불필요한 규제가 많을 뿐아니라 규제를 준수하는 정신 또한 부족하다.

규칙이란 지키면 서로 편리한 것이지만 피하려들면 서로 거추장스럽기만
한것이다.

한국의 경우에는 이들 두가지가 상승작용을 하고 있다.

예를 들어보자.

선진국에는 도시건축에 대한 정부규제가 적을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도시공간 배치와 부실공사방지 등을 위해 건물의 용도 주차시설 구조높이뿐
아니라 지역에 따라서는 건물의 색깔이나 형태까지도 규제하여 우리보다
규제조항이 훨씬 많다.

그러나 모든 시민이 공익을 위해 불평없이 규제를 준수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주차장규제가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사례에서 보듯이 틈만
있으면 규제를 피해가려 하기 때문에 부작용이 커지고 있는 것이다.

이제 한국경제는 무한경쟁시대에 성장을 지속하기 위해서 뿐아니라 정경
유착과 부정부패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도 규제경제를 자율경제로 전환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게 하기위한 향후의 과제는 어떤 것인가.

첫째로 정부의 규제자기능과 기업가기능을 과감히 축소하고 심판자적
기능을 확대해야 한다.

그러자면 행위규제에서 룰 중심규제로, 그리고 직접규제에서 간접규제중심
으로 이행해야 한다.

둘째로 현행 규제는 수백개의 관련법령으로 얽혀있는바 규제법령의 대정비
를 추진하고 규제권의 과감한 지방이양이 있어야 한다.

셋째 집단적 선택을 필요로 하는 공공섹터에 대한 규제는 강화하는 방향
에서 이를 재정비해야 한다.

넷째 규제의 완화 또는 강화에 따른 조치는 부처이기주의 사회적관행
기득권계층 등으로부터 커다란 저항을 받게 될 것인바 이를 강력한 개혁
의지로 극복해야 할 것이며 행정규제에 대해서는 이를 철저히 준수하도록
강력한 행정력을 발휘해야 할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1월 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