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인이 세수를 하고 있는데 보채가 들어와 보옥을 찾았다.

"도련님이 언제 자기 방에 붙어있는 걸 보았어요? 아침에 눈을 뜨기가
무섭게 달려나갔지"

"또 대옥의 방으로 갔겠군"

보채가 이빨로 아랫입술을 자근자근 깨물며 잠시동안 멍하니 서있기만
했다.

습인이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투덜거렸다.

"글쎄 아무리 허물이 없는 친척간이라 하더라도 지켜야 할 예의는 있는
거 아니에요? 더군다나 남녀간인데 말이에요.

그런데도 밤이고 낮이고 같이 붙어다니니"

보옥을 염려하는 습인이 보채의 마음에 들어 보채는 습인과 이것저것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습인과 이야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보통 시녀들하고는 다르다는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보채는 습인과 잘 사귀어 놓으면 보옥의 마음을 자기에게로 돌리는데
유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였다.

얼마후 보옥이 돌아오자 보채는 습인에게 눈짓을 하고는 얼른 일어나
나가버렸다.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낀 보옥이 습인에게 물었다.

"내가 오자 왜 갑자기 보채가 나가버리는 거야? 둘이서 소곤소곤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말이야"

"그걸 왜 저에게 물어요? 당사자에게 직접 물어보시지. 제가 어떻게
당신네들의 기분을 알수 있겠어요?"

습인이 여느때와는 다르게 쌀쌀맞게 대꾸하였다.

보옥은 습인이 뭔가 골이 난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습인의 비위를
맞추어 주려고 빙긋이 웃어보였다.

그러나 습인에게서는 여전히 찬바람이 돌고 있었다.

게다가 모든게 귀찮다는 듯이 습인이 구들위에 벌렁 누워버리는 것이
아닌가.

"좋아. 나도 그럼 잠이나 자지"

보옥도 부아가 나서 자기 침대로 와 누워버렸다.

아침에 일어나자 마자 세수도 하지 않고 대옥의 방으로 가서 대옥,
상운이들과 놀다가 온것에 대하여 습인이 화가 난게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지만, 그렇다고 시녀가 저렇게 벌렁 드러누워도 되는 건지
보옥으로서는 서운하기 짝이 없었다.

보옥이 부루퉁한 얼굴로 눈을 감고 누워있으니 습인이 다가와 외투를
덮어주었다.

보옥은 몸을 뒤척이는 척하며 외투를 침대 밑으로 홱 팽개쳐버렸다.

보옥이 자고 있지 않다는 것을 눈치챈 습인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도련님, 그렇게 성내실 필요없어요.

앞으로는 제가 벙어리가 되어 아무말도 하지 않을 테니까요.

도련님이 무슨짓을 하든 일체 상관하지 않겠다구요"

보옥은 참다못해 벌떡 몸을 일으키고 말았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1월 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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