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해의 끝에서 되돌아보면 다사다난하지 않은 해가 있을까마는 지난
을해년은 유난히도 굵직한 사건-사고들로 얼룩진 한해였다.

한마디로 "충격과 분노의 한해"였다고나 할까.

발전의 상들이 어처구니없이 붕괴되는 모습과 전직 대통령의 비자금파문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느꼈던 치욕과 허탈감은 그 무엇으로도 위로받을 수
없을만큼 깊은 것이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경제부문의 괄목할만한 성공이 유일한 버팀목이 되어준
것은 그나마 다행한 일이 아닐수 없다.

올해 우리 경제는 적어도 외견상으로는 나무랄데 없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실질 경제성장률이 9.3%에 달했고 물가는 5%미만에서 잡을수 있었다.

수출 1,000억달러, 1인당 국민소득 1만달러 돌파는 스스로도 대견한
기록들이다.

적어도 수치상으로는 우리 경제가 선진국 문턱에 성큼 다가섰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무엇보다 반가운 것은 불과 몇년 전까지만 해도 심각한 경쟁력약화가
우려되던 제조업부문이 10% 이상의 높은 성장률을 기록했고 소비보다는
수출과 기업의 왕성한 설비투자가 경기를 이끌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성장의 내용을 좀더 자세히 뜯어보면 우리 경제의 고질적 병폐가
더욱 자심해진 한해였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지난해에 이어 계속된 경기 양극화현상은 단순처방으로는 쉽게 치유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올해 경기가 정점에 이를만큼 호황을 누렸다고는 하나 그것은 일부 중화학
전자업종과 대기업이 주도했을 뿐 경공업 중소기업은 심각한 불황을 겪었다.

호황의 해에 1만4,000여개의 중소기업이 부도로 쓰러졌다면 경기가 나빠질
내년에는 어떻게 될지 걱정이 아닐수 없다.

이같은 "경제실핏줄"의 경화현상은 경기연착륙을 저해할 것이 뻔하다.

뿐만 아니라 지수 물가는 목표를 달성했지만 체감 물가는 위험수위에 육박
하고 있어 걱정이다.

수출이 잘됐다고는 하나 우리산업의 고질적인 수입의존적 구조 때문에
국제수지 적자는 크게 확대되는 모습을 보였다.

무엇보다도 안타까운 것은 우리경제의 야전사령관격인 대기업그룹 총수들이
비자금파문에 연루돼 줄줄이 검찰에 소환되거나 법정에까지 서야 했던
일이다.

이들의 시련은 곧바로 기업활동의 위축으로 나타나고 있다.

내년의 설비투자증가율이 올해의 17%에서 7.2% 수준으로 떨어질 것이라는
전망도 기업인들의 의욕저하와 무관하지 않다.

한편 경제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국민모두는 나라전체가 얼마나 큰 병에
걸려 있는지를 일련의 "세기적"인 사건-사고를 통해 새삼 확인한 한해였다.

대구 지하철공사장 가스폭발사고에 이어 전연의 성수대교붕괴 악몽을
떠올리게 하는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는 우리의 고속성장이 속빈 강정이었음을
다시한번 뼈저리게 확인시켜 주었다.

꼬리를 물고 터진 각종 구조적 비리사건들 중에서도 노태우 전대통령이
재임중 수천억원을 받아 챙긴 혐의로 구속돼 재판정에 선 사건은 권력층의
부패관행 척결 없이는 세계화고 뭐고 없다는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계기가 됐다.

비자금파문은 마침내 김영삼 대통령으로 하여금 5.18특별법 제정이라는
단안을 내리게 했고 이에따라 12.12와 5.17 군사반란 주도혐의로 전두환
전대통령이 전격 구속 수감됐다.

두 전직 대통령이 구속되면서 우리사회는 "명예혁명"적 역사 바로세우기
작업이 본격화된 가운데 해를 넘기게 됐다.

34년만에 지방자치 시대를 본격 부활시킨 6.27 4대 지방선거결과 집권당이
참패함으로써 정치권에 지각변동을 가져왔다.

경제개혁도 꾸준히 추진돼 부동산실명제가 7월부터 시행됐다.

이 제도는 사상 최악의 아파트 미분양사태를 빚는등 부작용도 있었지만
부동산 투기근절등 많은 긍정적 효과를 거두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우리의 경제적 성공과는 대조적으로 북한은 거의 탈진한 모습을 보였다.

김정일 후계체제는 아직도 자리를 잡지 못한채 식량난과 경제난이 극에
달했다.

한국정부의 대북 쌀 지원으로 돌파구가 열리는듯 하던 남북관계는 북한의
자포자기식 무력도발위험이 커지는 상황으로까지 오히려 악화됐다.

외부 세계를 휩쓴 변화의 격랑 또한 높았다.

연초부터 세계무역기구(WTO)체제가 출범함으로써 지구 전체의 경제단일권
형성을 가속화시켰다.

러시아와 동유럽에서 좌파세력이 부활조짐을 보였는가 하면 고베대지진등
천재지변과 무차별 테러의 공포가 지구촌을 엄습했다.

인종청소 전쟁으로 불리는 보스니아 내전은 평화협정이 가조인됨으로써
전쟁종식의 기틀이 마련됐고 팔레스타인 자치협정이 체결됨으로써 중동평화
에도 큰 진전이 이룩됐으나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가 암살되는 희생이
따랐다.

이처럼 지구촌이 변화의 물결에 휩싸인 가운데 우리정부가 연초에 내걸었던
"세계화원년"의 캐치프레이즈는 과거청산작업의 그늘에 가려 퇴색한 느낌
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진통은 선진국도약을 위한 기초다지기로서,
반드시 치러야할 대가라고 할수 있다.

1995년을 마감하면서 우리 모두가 다짐하는 것은 이제 과거청산작업의
깨끗한 마무리로 국가기강을 바로 세우는 동시에 하강기에 들어선 경제를
되살려야 한다는 것이다.

일견 상충되는 듯한 이 두마리의 토끼를 동시에 잡아야 하는 우리의 항해는
결코 순탄치만은 않을 것이다.

역사적 소명의식에 충일한 정부와 불굴의 투지로 무장한 기업과 절제와
인내를 아는 국민만이 이 어려운 과업을 달성할수 있을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12월 3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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