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원 < 서울대 사회대 교수 >


최근 세계경제질서는 급변하고 있다.

WTO체제의 출범에 따라 급속한 국제거래의 자유화와 함께 이제껏 각국이
자의적으로 실시해 오던 대외경제 관련 제도 정책및 관행 등을 국제적으로
접근시키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는 지난 11월 오사카 회의를 계기로
2000년대 초까지 무역투자자유화를 이룩할 의지를 재확인했다.

EU가 북미 남미 동아시아및 지중해 연안제국과 교섭하고 있는 자유무역지역
의 설립이 단순한 제안만으로 끝날것 같지는 않다.

경제의 세계화에 대비하기 위한 여러 국가들의 적극적인 움직임은 과거와는
다른 변화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몇가지 예를 들어 보자.

독일의 경우 이미 2년전 미래를 준비하기 위하여 산업경쟁력 강화를 취지로
하는 연방정부의 보고서(슈탄도르트 도이치란드)가 작성되었다.

정부가 오랜기간 기업 노조 시민단체 경제단체및 학계등 광범위한 사회
계층의 의견을 종합한 이 보고서는 독일이 안고있는 과제를 풀기위한 구체적
대안들을 열거하고 있다.

신규 고용창출의 어려움, 인력.자본의 불완전 고용, 인구구조의 고령화,
고학력사회의 병폐, 통독에 따른 사회적 비용의 증가등 독일 특유의 구조적
고민이 나열되어 있다.

일본을 보자.

총리자문기관인 경제심의회는 각계의 의견을 충분히 거른, 21세기 경제
운영의 혁신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한마디로 정부.기업.개인간 협조체제에 의존하던 시대가 지났으므로 제도와
관행이 바뀌고 따라서 정부를 비롯한 모든 경제주체가 변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예를 들면 시장이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지적
되었으므로 특히 기업집단의 폐쇄성, 개인의 집단에 대한 과도한 의존,
그리고 남성및 회사 중심 사회의 문제점들이 경제 사회 발전을 저해한다는데
공감이 형성되고 있다.

프랑스에 있어서도 새정부 출범이후 총리의 주관 아래 작성된 "2000년의
프랑스"라는 보고서가 발표되었다.

기업인 공직자 학자및 금융인등 사회여론 주도층으로 구성된 위원회가
주관한 동보고서는 더욱 치열해지는 국제경쟁속에서 승자가 되기 위해서는
최대의 과제로서 국민 각자가 세계화에 수반되는 변화를 적극적으로 수용
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에따라 정부는 사회구성원간의 대화폭을 넓혀 세계속에서 현재 프랑스가
처한 실상을 정확히 알리고 각 경제주체가 스스로 해결책을 모색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이상 몇가지 사례가 한국사회에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가.

한국 경제 사회가 이와같이 변모하는 세계질서에 과연 능동적으로 대처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져 볼수 있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앞으로 몇년이 우리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한 시기라는
점이다.

새로운 세계질서의 형성이라는 변혁과정에서 이룩된 국내기반의 축적은
21세기 국제경쟁력의 확보 여부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지적한 주요제국의 변화하려는 노력은 무엇보다도 정부 주도아래
사회적 합의와 시장경제의 활성화를 통하여 국가가 지향하는 목표와 단계별
일정을 분명히 설정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러한 전제가 충족되지 않고서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경쟁력과 생산성
제고를 기대할 수 없음은 물론이다.

절차와 과정을 생략한채 모양만 갖춘 전망의 제시나 단편적이고 일관성
없는 정책의 채택은 세계화를 위하여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을 낭비하고 경제
사회의 발전방향을 오도할 뿐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의 순서는 우선 사회 각계의 여론 수렴을 거쳐 설득력
있는 혁신적 비전의 수립이다.

사회가 지향하는 목표는 결국 경제주체의 자율적 협조가 있어야만 달성되기
때문이다.

초기 산업화 단계에서는 사회부문을 희생하면서도 경제성장을 이룩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간 경제규모가 커지고 삶의 질적 변화와 함께 국민의식도 크게
달라진 현상황에서는 사회발전 없이는 경제발전, 나아가 그 기초가 되는
성장 잠재력의 개발이 이룩되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사회통합은 한국적 특유의 여건을 고려할 때 이제껏 누적되어 온 비리나
부조리등 이른바 자본주의적 남용이 되풀이 될 수 없는 법제도의 확립에
의하여 새로운 흐름을 정착시킬때 실현될 수 있다.

법제도와 사회질서 자체가 과거의 좌절감이나 갈등을 청산하고 각 경제
주체의 자발적 참여를 통한 사회목표의 설정으로 연결될 수 있어야 한다.

한국사회는 중장기적으로 그 대안을 준비해야 할 허다한 과제에 직면하고
있다.

고용및 인구구조 직업재훈련및교육 지역균형발전 공정거래질서 통일경제
정보화 산업구조조정 경쟁정책 경제력집중 영세상인 농업부문및 중소기업의
경쟁력등이 그간 논의되어온, 또는 새로이 등장하는 몇가지 예이다.

이들 과제는 정부가 바뀐다고 달라질 내용이 아니다.

사회적 합의를 바탕으로 장기적 전망과 구체적 일정에 따라 착실히 그
대안이 모색되지 않으면 안되는 국가목표들이며 또 그 과정에서 정치적
고려가 우선될 수도 없다.

끝으로 국가목표의 설정과 추진에 있어서 한국과 같은 경우 다른 국가
보다도 더 정부의 선도적 역할이 강조된다는 점에서 그 원칙과 기준을
확고히 정립할 필요가 있다.

특히 정부는 최근 국제적 추세가 시사하듯이 우리 경제가 처한 현실을
정확히 알리고 또 사회각계의 진단과 제언을 받아 사회가 지향하는 방향을
진지하게 모색할 때라고 믿는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12월 2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