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민정음을 창제한 세종은 1447년 (세종29) 1년전에 세상을 떠난
소헌왕후의 명복을 빌고자 아들인 수양대군(뒷날 세조)로 하여금
"석보상절"을 펴내게 한다.

중국 양나라의 승 우의 "석가보"와 당나라의 승 도선의 "석가씨보",
당시 부사직인 김수온이 앞의 두책을 보충 편찬한 "석가보"등 불전들에서
석가의 가계와 일대기를 추려내 편집을 한 것이었다.

"석보상절"을 받아본 세종은 석가의 행적을 자신의 노래로 부른
악장체의 찬불가인 "월인천강지곡"을 지었다.

왕후를 극락정토에 들게 하고 건강이 좋지 않던 자신도 그 세계로
가야겠다는 염원이 담긴 것이었다.

국한문호용체 초장으로 되어있는 이것들은 1449년에 간행된다.

"석보상절" 문장안의 한자에는 그 음과 뜻을 훈민정음으로 주석을
하고 "월인천강지곡"은 한자어라도 훈민정음으로 그 음을 먼저 적은
다음 그 밑에 한자로 표기한 것이 특징이다.

세조는 1459년(세조5)세종이 지은 "월인천강지곡"을 본문으로 하고
자신이 편저한 "석보상절"을 설명부분으로 하여 합편한 "월인석보"를
내놓는다.

목차도 바꾸고 문장과 표기법을 손질하는등 상당한수정을 가해 전혀
새로운 문헌으로 탄생시켰던 것이다.

세조가 "월인석보"를 편찬한 동기는 죽은 부모와 요절한 아들의 명복을
빌기위한 것이라고 되어있다.

그러나 사실은 그가 어린 조카 단종을 몰아내 죽이고 왕위에 올라
사육신 등 많은 신하들을 살육한 끝에 당한 정신적 고통과 회한, 무상의
수렁에서 벗어나 구원을얻고자 편찬했다는게 통설이 되어있다.

그 편찬동기야 어떻든 "월인석보"는 훈민정음 반포 당시에 편찬 간행된
"석보상절"과 "월인천강지곡"을 세조때 수정 보완하여 다시 간행한
것이라는 점에서 초기의 한글변천과정을 살펴보는데 없어서는 안되는
귀중한 문헌이다.

"월인석보"는 그동안 "석보상절"의 목차와 내용으로 미루어 모두 24권인
것으로 추정되어 왔으나 15권만이 전해지고 있었다.

그런데 순천대박물관이 지난 2월 초간본 제17권을 소장해온 김림자
(전남 장흥)에서 제25권을 찾아낸 사실이 최근 공식적으로 확인을
받게되어 "월인석보"가 모두 25권이었음을 입 해 주었다.

또한 월인천강지곡이 모두 580여수(현재 194수가 전해지고 있다)가
되는 것으로 추정되어 왔으나 제25권에 실린 새로운 7수의 마지막
번호가 583번인 것으로 보아 그 추정이 사실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다만 제25권의 앞뒤부분의 낙장으로 그 정확한 숫자를 알 수 없게
된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12월 1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