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랑잎 떼굴 떼굴
어디로 굴러가오.
발가벗은 이 몸이
춥고 추워서
따뜻한 아궁속을 찾아갑니다.

작사자는 그 누군지도 모르나 홍난파 작곡으로서 반세기도 넘은 동요지만
나는 소시적부터 취기만 있으면 자신의 음치도 잊은채 이 노래를 불러 마치
나의 지정곡처럼 되어 있는데 한마디로 하면 우리 목숨의 덧없고 가련함이
여실히 나타나 있다고 하겠다.

더구나 아파트 뜰의 그 무성했던 나무나 풀들이 지금은 잎새 하나 없이
앙상하게 서있거나 말라 스러진 모습을 보면서 겨울처럼 다가온 스스로의
목숨의 종말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다.

물론 이것은 나의 칠순도 중반을 넘긴 나이에서 오는 절박성이지만 그
누구도 죽음을 외면할수 없으리라.

그래서 어쩌면 현실치중의 경제인이나 그 취향의 독자들에게는 좀 저어되는
문제의식이지만 죽음은 누구에게도 객관적 사실만이 아니라는 뜻에서 이
기회에 함께 묵상해 보기로 한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죽음은 누구에게나 공포와 불안의 대상이다.

그런데 이 공포와 불안을 좀더 분석해 보면 첫째는 죽음에 이르는 고통에
대한 두려움이요, 둘째는 죽은 뒤에 올 미지의 세계에 대한 불안이라
하겠다.

하지만 이상한 것은 첫번째의 죽음에 이르는 고통에 대한 공포는 왕왕
우리의 삶 속에서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그 고통이 너무나 심하면 오히려
죽음의 안식을 더 바랄 때가 있다.

나의 직접 경험한 바로서도 해방 이듬해 북한에서 필화를 입고 탈출하다가
체포되었는데 때가 겨울이라 불기 하나 없는 유치장에서 얼어드는 추위와
고통과 절망에 휩싸여 오직 죽음만이 그리운 시간을 보낸 적이 있다.

이것은 내가 육신적 또는 심정적 고통을 손쉽게 예로든 것 뿐이지 우리 삶
속에서는 정신적 시달림이나 고통 속에서도 죽음의 안식이 간절해지는 때가
얼마든지 있다.

그래서 개인이나 집단의 자살이 감행되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바라는 "죽음의 안식"이 그렇듯 뜻대로 와지느냐가
문제다.

그야 우리 영혼의 불멸이나 내세가 없이 육신의 죽음으로 완전 종말을 짓고
만다면 공포고 불안이고 있을 것이 무엇인가?

죽을때 육체적 고통이야 약품으로 안락사를 도모할 수도 있지 않은가?

이렇게 따져볼때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의 정체는 내세에 직결되어
있음을 깨달을 수가 있다.

그런데 그 내세를 믿는 소위 신앙인인 나는 왜 죽음이 두려워지고
불안해지는가?

이것을 한마디로 하자면 행복한 내세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즉 이 세상 삶의 인과응보로 판가름날 내세의 길흉, 그것에 대해 인간은
전율하는 것이다.

만일 누구에게 저승에서의 행복이 확보되어 있다면 못 가본 외국이민을
떠나듯 죽음을 큰 희망속에서 맞이할수 있지 않겠는가!

사람은 누구나 죽음을 껴안고 산다.

이 때문에 오히려 인간은 무한을 자기안에 품고 있다.

그리고 이 무한(영원)속에서의 길흉의 택일을 이 세상에서 자기 스스로가
결정하고 마련해야 하기 때문에 인간은 죽음 앞에서 불안과 공포를 느끼며
전율하는 것이다.

기독교적 표현을 빌리면 그 하나는 천당행이요, 또 하나는 지옥행인
것이다.

이 갈림길과 벼랑 앞에서 불안과 공포와 전율이 없다면 오히려 거짓말이다.

더욱이 죽음은 도둑처럼 오는 것이기 때문에 그 불안은 항시적이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에만 눈에 핏발을 세우고 아귀다툼에 나날을 보낼 것이
아니라 오늘서부터 저 영원에 부합된 삶을 살아야 한다.

아니 오늘서부터 영원을 살아야 한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12월 1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