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 이황(1501~1570)선생과 율곡 이이(1536~1584)선생이 출현하여 조선
성리학이라는 조선 고유 이념의 기틀을 마련하는 것은 당시 사회전반이
이런 대학자의 출현과 고유이념의 확립을 간절히 요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 분 유현들은 35년의 연치 차이를 망각하고 존경과 기대로 한
마음이 되어 서로를 인정하고 아꼈으니 퇴계가 "주자대전" 연구결과로 58세
에 "주자서절요"이 저술을 끝마치고 나자 23세이 율곡은 아직 겨울 기운이
다 가시지 않은 음력 2월에 안동의 도산서당으로 퇴계를 찾아뵈러 떠난다.

퇴계를 찾아간 율곡은 심산궁곡 한적한 곳에서 오직 제자를 기르며 학문
연구에 골몰하고 있는 퇴계의 생활 태도에 깊은 감명을 받고 이런 시를
퇴계에게 지어 바친다.

"시내 나누어져 수수와 사수(공자가 강학전도하던 곳)인데, 봉우리 빼어나
무이산(주자가 은거 강학하던 곳)이로다. 생계는 경전 천권뿐, 행적은 집
몇 칸에 감춰졌구나. 가슴에 품은 뜻 개는 달 열어 주고, 얘기하며 웃는
소리 미친 물결 그치게 한다. 소자는 도듣기를 구하였으나, 한나절 한가함을
훔치지 않았으리까"

뜻밖의 방문과 헌시에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던 퇴계는 비를 핑계대고
율곡을 3일동안이나 잡아두고 극진히 대접하며, 다음 두 수의 시로 화답하여
율곡을 인가한다.

"젊어 이름을 떨치는 자네 서울에 있고, 늙어 병 많은 나 시골에 있네.
오늘 찾아올 줄 어찌 알았으리, 지난날 쌓인 회포 말해보세나"

"천재소년 이월 봄에 기쁘게 만나, 삼일을 만류하니 정신이 통한 듯하네.
비는 소나기 져 내려 시내에 차고, 눈은 옥꽃을 만들어 나무를 싼다. 말
빠지는 진흙탕 가는 길 막고, 해 부르는 새소리 경개 새롭다. 한잔 술 두잔
술을 내 어찌 얕게 하겠나, 이로부터 나이 잊고 도의로 다시 친하세"

참으로 아름다운 만남이다.

이런 아름다운 만남이 이기일원론이라는 조선성리학의 확고한 기틀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후에 율곡이 퇴계의 이기이원론을 발전적으로 계승하여 이기일원론의
체계를 확립하자 퇴계는 조금도 언짢아 하지 않고 오히려 이를 추장하고
격려하였다 한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12월 1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