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연말이다.

좀처럼 가라앉을 것같지 않은 어수선함 속에 한해가 저물고 있다.

자고 새면 달라지는 세상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변함없이 믿고 의지할수
있는 무엇인가를 바라는 것처럼 보인다.

서양화가 김영재 선생(76, 영남대 명예교수)은 화단과 바깥세상의
소용돌이에 아랑곳없이 30여년동안 자연, 그중에서도 웅장하면서도
부드러운 산을 그리는데 몰두해 왔다.

그의 그림속 산은 하늘과 맞닿아 있으면서도 거칠거나 위압적이지
않고 너그럽고 푸근한 모습으로 세상사에 지친 이들을 위로한다.

자연과 신의 위대함을 느끼게 하는 산그림으로 우리 화단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김화백을 서울서교동 작업실에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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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그리기 전에는 강을 주로 그리셨죠.

<>김화백 = 69년 영남대에 적을 두면서 낙동강근처 왜관주변의 이태리
포플러에 관심을 갖게 됐어요.

수직으로 쭉쭉 뻗은 모습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지. 그때부터 강과
모래, 이태리포플러가 있는 풍경을 그리게 됐어요.

한강변 덕소를 많이 그린 것도 그때문이고. 10년 가까이 소재로 삼는
바람에 강변작가라는 별칭도 얻었었지요.


-강에서 산으로 소재를 바꾼 특별한 이유라도.

<>김화백 = 79년 한 학기 강의를 쉬고 유럽일주를 했어요.

6개월 예정으로 떠났다가 10.26이 나는 바람에 4개월만에 돌아왔지만.

알프스에 올랐었는데 어느 정도 가다보니 산이 얼마나 무궁무진한가를
알게 된 거지요.

그때 산이란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게 아니라 위에서 내려다봐야 하는
거구나라는 걸 터득했어요.

돌아와 태백산과 설악산에 올라가 그리기 시작했지요.


-실제로는 알프스보다 히말라야나 남미의 안데스쪽을 더 많이
그리셨지요. 히말라야를 좋아한 까닭은.

<>김화백 = 83년 대만에서 전시회를 가진 것을 계기로 두달간 인도와
네팔을 여행했어요.

네팔에서 한달반동안 머무르면서 현장에서 30장의 그림을 완성했지요.

그때부터 히말라야에 애착을 갖게 돼 1백~2백호짜리 히말라야그림을
많이 발표해 히말라야작가라는 이름도 얻고.

히말라야를 좋아하는 건 더없이 웅장하기도 하려니와 부드럽고 푸근한
것이 우리산을 닮았어요.

설산인데도 전혀 차갑지 않고 세상사람 모두를 끌어안을 듯싶어요.

누가 뭐라고 부르짖어도 다 들어줄 것같고.


-킬리만자로 등 아프리카산도 있는데요.

<>김화백 = 아프리카에서 제일 높은 산을 택한 거지요.

킬리만자로근처에서 20일을 머물렀어요.

남미의 아르헨티나에서는 안데스산맥의 주봉인 아콩가과산을 많이
담았고.


-히말라야도 여러 각도에서 잡은 걸로 아는데요.

<>김화백 = 네팔과 인도쪽에서 본 히말라야는 거의 다 그렸어요.

파키스탄쪽에서 본 히말라야만 못그려 지난 5월 한국산악회를 좇아
파키스탄쪽 히말라야 등반을 감행했지요.

경비행기를 전세냈었는데 날씨가 나빠 띄우지를 못해 지금껏 아쉬워요.


-산악인들과 친분이 돈독하시죠.

<>김화백 = 잘 모르는 사람들은 내가 본래 산악인이었던 걸로 알기도
해요.

산에 오르다가 화가가 된 줄 아는 거지.

산을 그리려면 산속에 들어가지 않으면 안되는데 그렇다고 무조건 산에
간다고만 되느냐 하면 그건 아니고.

산에서 지내면서 산의 소리와 숨결을 들을 수 있어야 그림이 돼요.


-왜 산만 그리냐고들 하죠.

<>김화백 = 다른 그림도 그리고 싶은데 시간이 없어서.

같은 산이라도 시간과 계절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이 되는 만큼 산만
그리는데도 시간이 모자라요.

그려놓고 나면 좀더 근사해야 하는데 싶고.


-지난 얘기를 좀 해주시죠. 이른바 반국전파로 알려져 있는데요.

<>김화백 = 사실은 59년부터 61년까지 국전에 세번 입선했어요.

당시 국전은 인물좌상 위주의 정형화된 틀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처음부터 그 틀대로 그릴 생각은 없었고.60년 봉덕사종 표면을 극사실기법
으로 그렸는데 심사위원들 모두가 잘그렸다면서도 종처럼 그리지 이게
뭐냐면서 특선이 아닌 입선작으로 골랐다는 거에요.

말도 안된다 싶었지만 그래도 다음해에는 상을 타고 싶어 종각속에
잘 들어앉은 종을 그렸는데도 입선에 그쳤어요.

지금 생각하면 어리석은 일이었지만 당시엔 그렇게라도 해서 심사위원들
에게 아첨하려 했던 거지.

다음해엔 화가 나서 6.25의 참상을 극사실기법으로 "탄막지역"이라는
작품을 냈는데 그만 보기좋게 미끄러졌지.

그래서 내가 추구하는 그림으로는 안되겠구나 싶어 다시는 출품하지
않았어요.


-학부 전공은 미술이 아니셨죠.

<>김화백 = 정치외교학이었어요.

부친께서 보통학교교사로 계시던 진남포에서 중학교를 다니던중
졸업반때 월남했어요.

당시 이북에서 졸업을 못하고 내려온 학생들이 많이 다니던 성남
중학교를 졸업한 뒤 미술대학에 입학하려다 형편이 여의치 않아 건국대
정외과에 들어갔지.

진남포중학2학년때 총력미전에서 입선한 뒤 화가가 되려 아트리에
미술강좌를 신청해 공부하기도 해 대학2학년때 한영중학 미술강사를
했어요.

3학년때 6.25가 나는 바람에 육군종합학교 간부후보생으로 입대,
55년 현역군으로 복학해 56년 졸업과 함께 대위로 제대했어요.


-그럼 홍익대대학원은 언제 다니셨나요.

<>김화백 = 59년 홍익대대학원 1기로 입학했어요.

학부에서 미술을 전공하지 않았기 때문에 학부전공 2년 대학원과정
2년을 공부하고 63년 졸업했지요.

김숙진선생이 홍대대학원 졸업번호 3번 내가 4번이지.

김환기선생께서 당시 지도교수셨고.


-파란 산을 그리는 걸로 유명한데요.

<>김화백 = 공해가 심한 도시의 야산에서는 그런 현상을 발견하기가
어렵지만 큰산에 가면 어느 순간 산이 녹색이 아닌 파란색으로 보일
때가 있어요.

처음 발견한 건 지리산 백각동에서 장터목산정 가는 길이었는데
그야말로 파란색물감을 그대로 발라도 되겠다 싶을 만큼 파랗게
보였어요.

산을 보여주는 가장 신비로운 색이다 싶었지요.


-해거름때의 산을 가장 많이 그리는 것도 그 때문인가요.

<>김화백 = 그렇죠. 하지만 아침산도 많아요.

아침에도 그런 현상이 일 때가 있거든.안개가 끼거나 약간의 습기가
있는 산도 아름답고.


-선생님산에서는 날카로운 직선을 거의 찾아볼 수 없는데요.

산속의 세세한 부분도 없고. 어떻게 보면 산덩어리 그 자체라고나
할까요.

<>김화백 = 거칠고 사나운 것을 좋아하지 않는데다 산의 좋은점은
포용성에 있다는 생각때문일 거에요.

인생이라는 산속에도 크고 작은 많은 일들이 있지만 중요한 건
자기나름의 척도를 가지고 묵묵히 살아내 큰 흐름을 이루는 것이다
싶기도 하고.

우리산이 각진 곳 없이 부드러운 까닭도 있고. 설악산이 삐죽한 것같아도
실제로 가보면 날카롭지 않아요.


-그간 화단에선 현대미술이라는 이름아래 추상미술운동이 여러차례
펼쳐졌는데 풍경이외의 작품에 별로 손을 안댄 이유는.

<>김화백 = 추상으로 바꿀까 생각한 적도 있었어요.

71년 서울 관훈동의 도라장화랑에서 칠보회화전을 열면서 추상작품을
발표했었지.

칠보회화를 내놓은 것은 아마 그때 내가 처음이 아니었나 싶은데.

그런데도 추상쪽으로 안가고 계속 구상쪽에 머문 것은 내속에 있는
무엇인가가 그리로 가지 말라고 막았기 때문이지요.

체질에 구상이 맞기도 한 것같고.


-크리스찬이시죠. 언제부터 교회에 다니셨나요.

큰산을 그리는 것과 신앙 사이에 연관관계라도.

<>김화백 = 모태신앙이에요.

할아버지께서 목사셨지요.

나는 월남한 뒤 영락교회에 40년동안 다녔어요.

산앞에 서면 언제나 겸허해져요.

신앞에 설 때도 마찬가지고. 자연만큼 신의 존재를 확인시키는 것도
없어요.


-건강이 상당히 좋으신데 비결이라도.

<>김화백 = 지난봄에도 브라질 상파울로까지 24시간이나 비행기를
탔으니 좋은 편이겠지요.

84년부터 대한항공을 탄 횟수만 8백4회나 돼요.

역마살이 끼었지. 비행기를 8백번도 넘게 탔으니. 그래도 비행기 타는
일이 싫지 않아요.

건강한 건 글쎄. 산에 열심히 오른 이유도 있는 것같고. 크게 또는
반드시 뭘 해야겠다는 욕심 없이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한 게 이유라면
이유랄까.


-젊은 사람들에게 주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김화백 = 선입견을 갖거나 색안경을 끼지 말라는 거에요.

잘못 하면 엎어놓은 독을 보고 이놈의 독은 입이 막혔군 하거나 바로
세워놓은 다음에도 밑이 빠졌군 하는 우를 범할 수 있어요.

그러면 낭만이 없는 것이지요.

나이든 사람도 마찬가지지만 젊은 사람에게 낭만은 특권이에요.

낭만을 알아야 오묘한 자연의 비밀을 꿰뚫을 수 있어요.

자연의 비밀을 알면 신과의 대화가 가능해져요.

세상을 원망하고 그로 인해 자신과 주위를 피폐하게 만드는 일을
피할 수 있지요.


-앞으로의 계획은.

<>김화백 = 강의를 안하니 이제부터 정말이지 맘껏 그려 대작전을
가져야지. 선생을 너무 오래 했어요.

30년도 넘게 해 명예교수까지 됐으니.

내년에 파키스탄에 가서 비행기를 빌려 공중스케치를 해볼 작정이고.

우리나라 작가들은 너무 조로한 경향이 있어요.

일본만 해도 60세가 되도 중견이면 모를까 중진소리 듣기가 어려운데
우리는 50만 되면 중진이요 60이면 원로에요.

어떤 사람들은 그 나이에 무슨 대작을 그리냐고도 하지만 나는 작은
것만 그리면 큰 건 언제 그리나 생각하지요.

창작하는 사람이 창작을 안하면 그게 죽은 거지요.


( 김화백은 경북 봉화 태생으로 홍익대 대학원을 졸업한 뒤 그간
국내외에서 14회의 개인전을 가졌다.

영남대미술대학장 한국기독교미술인협회회장을 지냈으며 현재 영남대
명예교수로 한국미술협회고문을 맡고 있다).

< 대담 = 박성희 문화부장 >


(한국경제신문 1995년 12월 1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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