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대통령이 빨간 사인펜을 들고 직접 낙점(임명)하는 자리는
5천개쯤 된다.

2만자리를 임명한다는 미대통령만은 못하지만 역시 막강의 자리임에
분명하다.

증권가의 몇안되는 자리도 물론 이 5천자리에 포함된다.

그러나 자리가 많아도 아무나 앉힐 수는 물론 없다.

나름대로의 경력이 요구되고 이를 갖추지 못하면 낙하산 시비가 붙게 된다.

증권계에는 그 어느 곳보다 낙하산들이 많다.

재미있는 것은 낙하산을 떨구는 비행기의 출발지에 따라 착지점,즉 이들이
차고들어오는 증권기관도 나누어져 있다는 점이다.

대한투자신탁의 사장으로 임명됐던 모인사는 부임 첫날을 회사 인근 다방
으로 출근했다.

물론 낙하산 시비가 붙어 직원들이 출근을 막았다.

한국투자신탁의 모신임 사장도 노동조합이 내건 "낙하산 반대"플래카드의
숲을 온몸으로 뚫고서야 겨우 출근을 했다.

이들은 모두 구재무부 출신들이었다.

낙하산을 막네 어쩌네하는 분쟁은 증권 거래소 증권업 협회등에서도 자주
일어나는 일이다.

투자신탁 사장자리는 증권가의 낙하지점으로는 최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금융기관으로서의 덩치는 크지만 임자가 없다는 점, 공익성이 요구된다는
점, 역사가 짧아 내부에 사장 적임자가 없었다는 점등이 그동안의 낙하산을
정당화해 왔던 것이다.

더구나 은행장과는 달리 여론의 감시도 거의 받지 않아 "문제있는 낙하산"
으로는 최적이었다.

그래서 5공화국 시절엔 놀고있던 대통령의 사돈이 하루아침에 사장으로
부임해오기도 했고 낙선 국회의원들도 돌아가며 사장을 했다.

당시에는 봐주야 할 사람중에 군인들이 특히 많았다.

증권계의 가장 높은 자리라 할수 있는 증감원장 자리에는 역시 재경원의
고급 공무원 출신들이 부임해온다.

백원구 현원장이 재경원 출신이고 박종석 정영의 정춘택 박봉환 홍성희등
전임 원장들이 모두 구재무부 출신들이다.

증감원장을 끝내고도 한두자리 정도 더 보장해주는 것은 물론 영원한
재우회원(재경원 출신 공무원들의 모임)들의 의리다.

재우회의 의리가 해병대보다 결코 못지 않다는 얘기도 그래서 나온다.

증권거래소 이사장엔 한은출신들이 많았다.

60년대 초에는 헌병감 출신조차 이사장을 하기도 했지만 점차 한국은행
출신으로 자리를 넘겼다.

재무부는 감독원이, 한은은 거래소가 분담해 퇴직자들의 양로원 노릇을
해왔던 셈이다.

그러나 전임 고병우에 이어 홍인기 현이사장이 연이어 재무부 출신들이어서
한은전용 배출처로서는 빛이 바래고도 있다.

증권금융은 국세청 출신들이 잇달아 자리를 잡아 국세청 양로원이 됐고
예탁원은 재경원 출신들이 꾸준히 둥지를 틀고 텃세를 부리고 있다.

기관장 아래 임원자리에는 문민정부라는 지금도 퇴역 군인들이 날아들어
눈총을 받기도 한다.

증권협회장 자리는 변화가 많았다.

원래가 증권업자들의 자율적인 모임이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등장하는
인물의 출신도 노동부 장관, 상공부 차관, 육군 경리감 증권사 사장등으로
들죽날죽했다.

때로는 로비를 위해 "정부에 말이 통하는 인사"를 스카웃해 모셔오기
했으니 협회장의 면면은 당시 증권업자들의 위상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제4공화국 코리아게이트등에 등장하면서 세인의 인기를 모았던 장태완
수경사령관은 한동안 증권전산에서 세월을 씹으며 사장노릇을 했다.

그러나 이들 증권관계 기관장들의 출신 면면을 보노라면 우리나라 증시가
아직은 관치증시를 벗어나지 못하고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언제쯤이면 인사의 독립, 그래서 증시의 독립이 가능할 것인가.

(한국경제신문 1995년 11월 2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