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비 원춘이 보옥과 지낸 어릴적 일들을 떠올리는 사이에 어느듯 배가
안쪽 기슭에 닿았다.

"이제 배에서 내리셔서 가마에 다시 오르시요"

태감이 아뢰는 소리를 듣고 원춘이 배에서 내려 가마에 올랐다.

얼마 나아가니 아름다운 옥으로 꾸민 궁전이 나타나고 계수나무로 만든
높은 투각이 눈에 들어왔다.

그 앞에 세워진 편액용 바위에는 "천선보경"이라는 네 글자가 적혀
있었다.

하늘의 신선들이 쓰는 보배로운 거울이라는 뜻인데, 원춘이 볼때
아무리 궁전과 누각이 호하롭게 지어졌다고 하더라도 그 이름은 너무
비현실적이었다.

그래서 옆에 있는 태감에게 그 이름을 "성친별서"로 고치도록 지시
하였다.

성친별서라고 하는 것은 친정집 별궁이라는 뜻이었다.

원춘이 그 궁전과 누각을 지나 별채 정전으로 들어갔다.

정전 뜰에는 화로불이 기세좋게 활활 타고 있었고 뜰 가득히 향내가
진동하였다.

원춘이 어디서 이런 향내가 나나 하고 둘러보니 향가루가 땅에 잔뜩
뿌려져 있었다.

게다가 향로에는 사향과 용뇌 같은 향이 타고 있었다.

그리고 방금 지나온 물가의 나무들처럼 이곳의 나무들도 가지가지마다
초롱을 밝히고 있었다.

창틀은 금박을 입혔고 난간들은 백옥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문에는 대나무를 새우 수염처럼 정교하게 쪼개 만든 발들이 드리워져
있고, 바닥에는 수달피 자죽이 길게 이어져 깔여 있었다.

저 안쪽에는 꿩깃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병풍이 둘러쳐저 있기도 하였다.

그런데 원춘이 아무리 살펴보아도 편액이 보이지 않았다.

다시말해 이곳 이름을 어떻게 지었는지 알수가 없었다.

"다른 곳에는 어울리지도 않는 편액도 허다하게 있더니만 이곳에는
어찌하여 편익이 없는가요?"

후비가 물으니 시종드는 태감이 무릎을 꿇으며 대답했다.

"이곳은 정전이라 그 누구도 감히 이름을 지을수 없사옵니다"

그 말은 곧 후비만이 이름을 지으실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원춘은 섣불리 정전 이름을 짓는다든지 하지않고 고개만
끄덕이고는 다른 말이 없었다.

"후비마마, 자리에 오르셔서 가족들의 인사를 받으시지요"

의전을 책임맡은 태감이 어좌처럼 생긴 높은 이자를 가리키며 아뢰었다.

그러자 양쪽 계단에서 주악소리가 장엄하게 울려퍼졌다.

태감들의 안내를 받으며 먼저 가사 대감댁 사람들이 섬돌 아래에
모여섰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11월 2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