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영 < 한국불교연구원장 >


몇일전 나는 동서양의 고전에 나타난 도(도)의 의미를 묻는 쎄미나를
가졌다.

세상사람들이야 도무지 관심도 없는 주제라, 그저 뜻을 같이하는 분들이
다섯명의 발표와 열명의 논평을 하루종일 듣고 같이 생각해 주어서
고마웠다.

돈을 기꺼히 이런일에 써 준 분들에게도 깊은 감사를 드린다.

요즘 도기 땅에 떨어졌다고들 흔히 말한다.

도덕이 타락했다는 말이다.

인생에게는 인생이 걸어가야하는 길이 있다.

자연에도 도가 있다.

그 깊이와 도라는게 도대체 무엇인가, 무엇이 떨어지고 타락했단 말인가.

그것을 생각해 보자는 것이 회의를 계획하고 주관한 나의 생각이었다.

직접적인 동기는 원효가 불교를 한마디로 "도"라고 규정하고 있는 것이
하도 기가 막히게 마음에 들어서 원효가 이해하고 있는 "도"라는 것이
다른나라 고전들에 나오는 유사한 말들과는 어떤점에서 같고 어떤 점에서
다른가를 밝혀보고자 하는 것이 첫동기다.

즉 인도의 "다르마"(clharma 0), 노자와 장자의 "도", 그리고 중국 불교
에서의 "법"과 "도" 이런 것들에 관한 전문가들의 발표와 논평을 듣고 서로
비교 대조하면서 원효의 "도"를 생각하고 오늘 이 시대의 타락했다는 "도"를
생각해 보자는 것이었다.

인도의 "다르마"(법이라고 불교에서는 옮긴다)에는 노장의 "도"보다 훨씬
넓고 다양한 의미가 있다.

그러나 자연의 이치라던가 법칙, 인생의 도리라던가 하는 의미로서는 "도"
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나라를 정치적으로 다스리는 왕이 의거해야 하는 것을 "다르마"에 따라서
왕노릇을 하지 않으면 "다르마"의 훌륭한 결실을 수확하지 못하는 것이 왕도
이다.

사람은 "다르마"에 부합된 삶을 살고 있을때 누구나 그 삶의 가치가 귀하고
중한 것이 된다.

동경대 명예교수이며 세계인도철학회 회장을 역임한 한라(원)교수는
산스크릿트문학에 나타난 "다르마"를 폭넓게 개관하면서 독일의 할카
(Hacker)교수의 새로운 "다르마"해석을 소개했다.

실천하기 이전의 "다르마"(dhasma vor), 실천하는 과정의 "다르마"(dhaima
in), 실천하고 난후의 "다르마"(dhasma nach vollzug).

가톨릭신자인 K교수는 희랍의 "로고스"(Logos)가 성서에서는 신의 다른
이름으로 사용되면서 보편성보다는 특수성을 띈 것이 됨으로써 오히려 그
의미가 좁아지지 않았나 반성해 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도의 가도는 비상도요. 명의 가명은 비상명이니라.(도로서 도라고 규정된
것과 같은 틀에 박힌 도는 신실한 도가 아니요. 이름으로써 고정관념이 돼
버린 그런 이름은 진실한 이름이 아니다-노자 도덕경 제1장)

이 말의 뜻을 잘 알고 있던 원효는 올바른 깨달음, 나도 내것도 다 버리고
오직, 이 세상 모든 것과 한마음으로 살 수 있게 되는 그 마음가짐만 갖게
된다면 그 사람 가는 곳이 어디든지 거거가 참된 인생의 길이 된다고 주장
한다.

원효에게 있어서 "도"는 "알파"이자 "오메가"이다.

즉 원효의 "도"는 "마음닦는 길"인데 그 일은 마음에서 시작해 마음에서
학카교수가 라한 것과 통하는데가 있다.

또 원효에게 있어서 "도는 과정(Process)이다.

즉 학카의 실천도중의 "다르마"(Dharma in Vollzyg)인 것이다.

원효는 말한다.

"대해에는 나루가 소용이 없다. 배를 띠우고 노를 저어야 한다. 허공에는
사다리가 소용이 없다. 두 날개를 펴 힘차게 움직여야만 한다"

우리가 사는 삶의 현장을 대화와 허공에 비유했다.

두개의 노를 줄기차게 저으라는 것은 나와 남을 차별하는 의식이 사라진
"지혜"를 닦고 무조건 "자비"를 베풀며 살라는 것이요, 두날개를 힘차게
움직이라는 것은 사리사용을 없애는 마음공부 지와 관을 닦으라는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11월 26일자).

ⓒ 한경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