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민주주의 정치사에서 정당의 이름을 가장 오랫동안 유지해온 것은
미국의 민주당이 아닌가 싶다.

1828년 그 다음해에 제7대 대통령에 당선된 앤드루 잭슨의 지지파들이
서민층을 기반으로 결성한 이후 167년동안이나 그 이름을 이어 왔다.

민주당과 더불어 미국의 정치를 이끌어온 공화당 또한 1856년에 발족된
이후 139년동안 정당의 이름을 바꾸지 않았다.

노예제도에 반대하는 자유토지당계의 일부 민주당원과 페더럴리스당계의
휘그당원들이 모여 만든 당이다.

양당정치의 본산이라고 할수 있는 영국에서도 정당의 이름은 미국 못지
않게 오랜 전통을 지녀왔다.

17세기 혁명시대에 태어난 토리당을 모태로 결성된 보수당이 그 이름을
갖게 된 것은 1830년의 일이다.

165년전 진보적 자유주의정당인 자유당에 대항하여 만들어진 정당이었다.

보수당과 함께 2대정당인 노동당이 생겨난 것은 89년전인 1906년이었다.

1922년 총선에서 제2당으로 올라선 노동당은 자유당의 진보적 명맥을
이어받았던 것이다.

선진 민주주의국가들의 정당이 이름을 바꾸지 않고 전통을 이어올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일찍이 윈스턴 처칠이 지적한 정당인들의 특성에서 찾아질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의 주의를 위해 자기의 소속정당을 바꾸고 어떤
사람들은 당을 위해 자기의 주의를 바꾼다" 처칠의 이 말은 어떠한 경우
에도 정당이 정당인보다 우위에 있어야 함을 시사해 준다.

그것은 한걸음 더 나아가 정당이 간부정당 또는 명사정당이 아닌
정책정당이 되어야 함을 뜻하는 것이다.

건국이후의 한국정당사를 되돌아 보면 정당은 정치적 야심을 가진 인물들
의 전유물이 되었다고 지탄을 받아도 될 정도였다.

제1공화국의 대부분 기간인 9년간을 집권한 자유당과 3,4공화국 18년간
집권당으로 군림한 민주공화당은 집권의 종언과 더불어 이름이 사라졌는가
하면 5,6공화국 8년간의 주도세력인 민정당은 3당통합으로 기치를 내렸다.

야당 역시 수없는 이합집산을 겪으면서 "한국" "민주" "국민" "민중"
"신민" "신한" "통일"등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한 이름을 붙이고 출범했으나
단명을 면치 못했다.

민자당이 당의 이름을 고쳐 새롭게 태어날 작업에 착수했다 한다.

6공과의 단절 차원에서 피할수 없는 일이겠으나 중요한 것은 형식에 앞서
내실을 갖추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처칠의 말대로 정당인의 위에 있는 정당이 되어 달라는 얘기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11월 2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