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은 천하의 명산이다.

그래서 고래로 문인묵객들이 이 산을 유람하고 유람기를 남겨 놓는
경우가 허다하였는데 필자가 가장 감명 깊게 읽었던 것은 조선 중기 4대
문장가 중 으뜸으로 꼽히는 월사 이정구(1546~1635)의 "유금강산기"
상.하이다.

"떠가는 구름과 흐르는 물(행운유수)"로 비유되는 그의 유려한 문체가
워낙 거침없이 그 유람현장을 묘사해 나갔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 풍류
넘치는 유람 행차가 한없이 부러워서 영 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월사는 선조36년(1603) 계묘8월에 예조판서로 있으면서 태조의 모후
의혜왕후 영흥최씨의 능침인 화능을 보수할 일이 있어 함흥에 갔다 오는
도중 금강산을 유람하게 되는데 이때 간성군수로는 당대 문장으로 자부하던
간이 최립(1539~1612)이 가 있었고 흡곡 현령으로서는 석봉체의 창시자인
명필 한호(1543~1605)가 내려가 있었다.

이들은 모두 월사와 뜻을 같이하던 명사들이었다.

그러니 이들과 함께 어울리는 금강산 여행이 얼마나 운치있었겠는가.

월사는 조촐한 여행을 위해 서울에서 떠날 때부터 종 하나 데려오지 않고
오직 대금 잘부는 악공 함무쇠만을 데려왔기 때문에 금강산에 들어갈 때도
무쇠만을 데리고 들어갔다.

금강산 초입인 장안사 입구에 이르러서 함무쇠로 하여금 말위에서 대금을
불며 들어가게 하니 장안사 노승이 나와 맞으며 누구냐고 묻는다.

나는 서생인데 서울에서 노라 하며 근래에 놀러온 사람이 없느냐 하니
예조판서가 함흥에서 일을 보고 외금강으로부터 들어온다고 각 읍에서
공구를 가지고 와서 기다린지 여러 날인데 바로 서울로 돌아갔는지 알 수
없다고 한다.

월사는 계속 서생행세를 하며 금강산을 구경하는데, 만폭동에 이르러서는
학소대와 금강대를 바라보며 조촐한 주연을 베푼다.

이 몰래 함무쇠를 향로봉 정상으로 미리 올려 보내 때 맞추어 대금을 불게
하니 일행들은 모두 신선이 연주하는 천악으로 착각하였다 한다.

이 대목에 이르면 마치 그 자리에 함께 앉아 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

요즘 세상에 이런 풍류를 함께 할 수 있는 명사가 과연 얼마나 있을지.

이제 밥 먹는 걱정에서는 벗어났으니 조상들이 어떻게 살았기에 우리가
문화민족의 후예라고 하는가 하는 것쯤은 되돌아 볼만도 하지 않을까.

(한국경제신문 1995년 11월 2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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