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정사상 초유의 사건으로 기록될 전직대통령의 구속을 보는 재계는 착잡한
심경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다시는 이런 부끄러운 역사가 반복되지 말아야
한다"(H그룹 K사장)고 입을 모은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최고 권력자의 부정부패가 더이상 되풀이 되지 않도록
우리 사회에서 "비자금" 자체를 뿌리 뽑아야 한다"(전경련 관계자)는게
재계의 한결 같은 바람이기도 하다.

노태우전대통령의 구속을 교훈삼아 권력과 기업사이에서 독버섯처럼 자라온
"정경유착의 고리"를 분명히 단절하지 않는다면 제2, 제3의 "전직대통령
구속사태"가 이어지지 않을 거라고 단정할 수 없다는게 재계의 지적인
셈이다.

재계는 우선 정경유착의 근본원인인 정부의 각종 규제를 제거하는게 문제
해결의 순리라고 주장한다.

"대통령이 수천억원의 비자금을 조성할 수 있었던 건 다름아닌 정부의
"규제"에서 비롯됐다"(S그룹 관계자)는게 재계의 공통된 시각이어서다.

이런 시각은 16일 청구된 노태우전대통령의 구속영장 내용에서도 반증
된다는게 재계의 인식이다.

"...기업경영과 관련된 경제정책등을 결정하고 금융.세제등을 운용함에
있어서...혜택을 부여하거나 불이익이 없도록 선처해 달라는 취지로 제공
하는 000억원을 교부받아 그 직무에 관하여 뇌물을 수수한 자로서..."(구속
영장 전문내용중)

기업들이 대통령에게 적게는 수억원에서 많게는 수백억원까지 갖다 바친
것은 다름아닌 "(기업에게) 혜택을 부여하거나 불이익을 줄수 있는" 대통령
의 권한때문이었다는 얘기다.

바로 "그 무소불위의 권한을 휘두룰 수 있는 수단이 "규제"였던 만큼 규제
를 철폐하는 것만이 정경유착을 근절할 수 있는 길"(한국경제연구원 손병두
부원장)이라는게 재계의 목소리인 셈이다.

"누가 청와대에 돈을 갖다 주고 싶어서 갖다 줬나. 자기돈 아깝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지난 3일 경제계중진회의에서 모그룹 회장)는 말도
뒤집어 보면 마찬가지 결론에 도달한다는 얘기다.

이런 차원에서 최근 정부가 정경유착의 해소방안으로 사외이사제 도입등
또 다른 규제를 만들려는 것은 "넌 센스"라는게 재계의 주장이다.

"앞으로는 비자금의 원인인 규제를 철폐해 공정하고 투명한 기업경영풍토를
마련해 주어야할 정부가 기업을 옭죄는 틀을 신설하려는 것은 문제의 원인을
직시하지 못한 결과"(K그룹 기획조정실장)라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과거 잘못된 정치관행에서 비롯된 비자금 사태의 책임을 기업쪽으로
돌리려 한다"(L그룹 K사장)는 불만이 튀어나오는 것도 같은 이유다.

재계는 물론 기업 스스로도 자정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것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기업들이 먼저 알아서 비자금을 갖다준 책임도 있다. 특정 이권사업을
따내기 위해 경쟁적으로 로비를 했던 점도 무시할 수 없는 만큼 기업들이
공정한 경쟁에 임하려는 페어 플레이 정신으로 정도경영에 나서야 한다"
(D그룹 관계자)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일부 대기업들은 연말 정기임원 인사에서도 "로비에 능한 사람"보다는
"정보통"을 대거 발탁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기도 하다.

그럼에도 "기업이 공정한 경쟁을 벌이도록 하려면 정부가 먼저 "공정한
룰"을 만들고 사심없는 심판자로서의 역할만을 자처하는게 순서"(S그룹
비서실 관계자)라는데는 이견이 없다.

정부가 맑고 투명한 기업경영환경을 조성해 주어야 기업들의 정도경영
의지도 효과를 나타낼 것이란 얘기다.

"문제 발생의 원인을 제공한 정부가 결자해지의 자세로 돌아가야 한다"
(C기업 사장)는 주문이다.

어쨌든 전직대통령이 뇌물 수수로 구속되는 "불행한 사태"가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정부와 기업이 모두 심기일전하는 것만이 "노전대통령
비자금 사건"에서 얻을 수 있는 뼈아픈 교훈이라는게 재계의 중론이다.

<차병석기자>

(한국경제신문 1995년 11월 1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