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은 문객들을 자신의 서재로 데려갔다.

거기서 오늘 이름짓기에 대한 총평이 있을 것이었다.

보옥은 자기도 따라가야 하나 어쩌나 하고 눈치를 보다가 아버지
가정으로부터 특별한 말이 없길래 일행을 엉거주춤 뒤따랐다.

그런데 서재를 막 들어서려는데 가정이 보옥을 발견하고 버럭 고함을
질렀다.

"이 녀석이, 지금까지 놀고도 무엇이 부족해서 여기가지 따라오느냐?
그만큼 놀았으면 어머니나 할머님이 걱정하실 것도 생각해야지.
냉큼 물러가!"

보옥이 기가 찰 노릇이었다.

보옥더러 후비 별채 이름짓기에 동참하라고 누가 그랬는데, 지금와서
놀기만 했다고 꾸지람을 하는가.

보옥이 자기딴에는 온간 지혜를 다 짜서 편액에 들어갈 글을 생각해내고
대련 시귀를 짓기도 하였는데 말이다.

아버지 가정이 야속해도 보통 야속한게 아니었다.

보옥이 억울함을 속으로 삭이며 서재를 물러나오는데, 가정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등뒤에서 들렸다.

"저런걸 어머님께서 귀여워하시다니 괜히 헛 수고만 하시는거야"

보옥의 두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보옥이 마당으로 나오니 상노아이들이 우르르 보옥에게로 모여들었다.

"오늘 대단한 일을 하셨어요 ''대단한 일이라니?''"

보옥이 방금 들은 아버지의 터무니없는 꾸지람으로 인하여 시무룩한
표정이 되어 대꾸하였다.

"이 지방의 쟁쟁한 문객들과 시재를 겨루어서 그들을 놀가게 했다면서요"

"글쎄, 그 문객들의 재주가 별것은 아니더만"

보옥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그렇게 문객들과 시재를 겨룰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된것은 우리
덕분이라구요"

"그건 또 무슨 소리인가?"

보옥이 하인들의 말에 고개를 갸우뚱하며 반문하였다.

"도련님이 문객들과 후비 별채에서 이름짓기를 하고 있을때 대부인께서
우리를 여러번 보내어 도련님이 어떠신가 알아오도록 하셨거든요.

대감님께서 도련님을 구박하시지나 않나 염려하신 거지요.

그래 우리가 대감님이 도련님의 글재주로 인하여 대단히 기뻐하고
계시다고 대부인께 아뢰었지요.

그 덕분에 도련님이 불려가지 않고 문객들과 계속해서 시재를 겨룰수
있게 된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 덕분이라고 말하는 거죠. 그러니까 우리에게 선물을
주셔야 돼요"

하인들이 보옥이 몸에 차고 있는 갖가지 패물들을 흘끗 훔쳐보았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11월 1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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