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자금사건으로 온통 벌집 쑤신듯한 분위기가 이어지면서 경제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미 "성장멈춤"의 징후가 드러나기 시작했고 내년부터는 "하강"이 예정돼
있는 싯점이어서 요즘 터져 나오는 한숨은 공연히 앓는 소리는 아니다.

물론 겉모습만 보면 큰 문제가 없어 보인다.

증가율이 작아지기는 했지만 아직도 성장은 유지되고 있다.

금리도 안정돼 있고 대기업 총수들이 불려 다니는데도 주가는 그런대로
버텨주고 있다.

부도가 늘긴 했지만 성장율이 떨어지는 속도를 감안하면 구조조정의 한
단면으로 치부할 수도 있다.

듣기좋은 말로 "연착륙"의 과정이라고 넘길만도 하다.


하지만 이같은 표면적인 고요함은 태풍전야의 모습일 뿐이다.

어느 한곳만 넘어지기 시작하면 물밀듯이 쓰러질수도 있는 아슬아슬한
형국이다.

전반적인 경기사이클은 이미 정점에 다가가 있다.

설비투자 예고지표들은 이미 마이너스로 돌아섰다.

내수소비와 수출증가율도 뚝 떨어졌다.

생산과 출하증가율은 급격히 둔화되고 있고 재고증가율은 걱정스러울 정도
로 높아졌다.

이젠 추락하는 속도만이 남았다.

중소기업들은 비자금 파문이후 사채시장이 위축됐다며 자금사정악화를
호소하고 있다.

이를 반영하듯 이달 들어선 하루에 60개사 이상이 부도를 맞고 있다.

부도대열엔 중견기업이라고 예외가 아니다.

이 와중에 오는 11일엔 민노총(민주노조총연맹)이 출범식을 갖는다.

그렇지 않아도 이번 사건이 노사간의 갈등요인이 될까 우려되는 파에
이제는 노노간의 마찰까지 걱정하게 됐다.

여기에다 내년엔 총선까지 껴있다.

선거는 논리로만 치자면 경제엔 악재다.

인력구득난과 물가상승 근로분위기 이완등은 선거때마다 치러온 홍역이다.

이같은 현상들이 물론 비자금사건의 탓만은 아니다.

일부는 이미 예견돼 있는 일정이다.

하지만 이번 파문이 악화되기 시작한 추세에 설상가상으로 덥친것만은
분명한 만큼 후유증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진행돼야 한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실제로 9월까지 나타난 산업활동 지표들의 동향을 보면 한결같이 "노란불"
을 켜고 있다.

적색등으로 바뀌기 직전의 모습이다.

3.4분기의 산업생산 증가율은 13.1%.

작년 3.4분기이후 최저치다.

출하증가율(13.2%)도 마찬가지다.

재고증가율(11.5%)은 92년이후 처음으로 두자리수를 기록했다.

적게 생산하는데도 팔리지가 않아 창고에 쌓이는 물건이 늘어나는
모양새다.

생산과 출하 재고지수들은 내수용 경공업분야 일수록 암울한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섬유 의류 고무 음식료등의 업종은 이미 진작부터 마이너스 행진을 지속
하고 있다.

호황 때에도 기를 못펴던 이들 산업은 경기하강 국면에서도 가장 먼저
타격을 받기 시작했고 이번 사건으로 인한 사채시장의 위축으로도 선두에서
피해를 입고 있는 꼴이다.

더더욱 투자지표는 암담하다.

지난9월중 공작기계 업계의 수주액은 작년 9월보다 3.7% 줄어들었다.

내수용과 제조업용의 감소폭이 유난히 컸다.

3.4분기 전체의 기계수주액은 작년보다 불과 0.9% 늘어나는데 그쳤다.

지난분기의 건축허가 면적은 작년보다 25.6% 감소했다.

91년이후 최저치다.

지난6일 재정경제원이 8개그룹 관계자들을 불러 내년도 투자계획을 물어본
결과 이들 그룹의 내년도 설비투자규모가 올해보다 11.4% 증가에 그칠
것이라는 답변을 들었다.

의례히 익년의 투자계획을 시안으로 짜는 이즈음에는 적어도 이듬해의
설비투자증가율이 평균 30%내외로 잡힌게 전례였다.

더군다나 재경원에서 물어볼 때는 돈을 쉽게 얻어쓰기 위해서라도 숫자를
가급적이면 부풀려 보고하게 마련이다.

실제 집행단계에서는 줄어드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는 설명을 당국이
덧붙일 정도였다 한데도 삼성그룹은 투자계획이 제자리라고 밝혔다.

쌍용과 기아그룹은 "감소"를 보고했다.

이정도면 결코 "내숭"은 아니다.

일상적으로 되풀이되는 교체수요만으로도 두지라수의 초반은 너무 작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투자의욕을 잃고 있거나 비자금파문에 의사결정권자가 불려다니는 통에
아직 계획을 잡지 못하고 있는게 분명하다.

더군다나 한국경제의 신화적인 얼굴들이 부정자금 제공자로 먹칠을 당하고
있으니 한국상품과 기업활동에 대한 국제시장에서의 시각이 고울리가 없다.

최근 모그룹이 오스트리아에서 기업을 인수한 것을 두고 그나라의 언론이
"부정자금 관련기업"이라며 비난을 했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곧이어 국내에서는 비자금 연루기업에 대한 세무조사도 벌어지게 돼있다.

일부는 형사처벌을 당할 가능성도 예견된다.

경제는 오그라들게 돼있고 기업은 몸을 사리고 국민들은 애써 일할 의욕을
상실한 상태.

정부마저도 일손을 놓은 지금의 모습이 외국언론에 비쳐진 한국경제의
자화상이다.

과거의 비정에 대한 청산도 중요하지만 경제도 보면서 가자는 말이 이유
있게 들리는 것도 그래서다.

<정만호 기자>

(한국경제신문 1995년 11월 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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