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놈아,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고 있느냐. 이 정전 이름을
지어보라니까"

아버지 가정의 고함소리에 보옥이 정신이 번쩍 들었다.

보옥은 선경에서 안았던 겸미 선녀의 몸과 지금도 현실세계에서
안고 있는 습인의 몸을 떠올리느라고 정신이 잠시동안 딴데 가 있었던
것이었다.

"네? 정전 이름요? 아까 어느 문객 선생이 말씀하신 봉래선경이
어울리겠는데요"

보옥이 자기가 따로 이름을 짓는 일을 면하기 위하여 얼떨결에 대답했다.

보옥의 속마음을 읽고 있는 가정이 그냥 넘어갈 리가 없었다.

"그 이름말고 새로 이름을 지어보라고 하지 않았느냐? 무슨 딴소리를
하고 있느냐"

가정이 더욱 엄한 얼굴로 변하였다.

보옥이 겸미와 습인의 몸에 정신이 팔려 있는 동안 가정의 지시를
잘 듣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아버지의 꾸지람 앞에 가정이 다시 기가 죽어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보옥을 안쓰럽게 여긴 문객들이 가정에게 슬그머니 제안을 하였다.

"오늘은 이름 짓기를 그만하고 내일 또 하지요.

날도 저물어가니 말입니다.

대부인께서도 보옥 도련님이 어떻게 되셨나 궁금해 하실 거구요"

그렇지 않아도 대부인이 하인들을 보내어 보옥이 아직도 문객들과
함께 이름 짓기 놀이를 하고 있나 알아보기도 하였다.

가정이 보옥을 너무 심하게 다루었다는 말이 대부인 귀에라도 들어가면
대부인으로부터 질책을 받을지도 몰랐다.

"좋다. 하루 더 여유를 주겠으니 이 정전 이름을 꼭 짓도록 해.

내일도 짓지 못하면 혼날 줄 알아.

여기 정전은 다른 곳보다 더욱 중요한 곳이니 특별히 신경을 써서
지어야 해"

"네. 알았습니다"

보옥이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며 얼른 대답하면서 정전 누각을
슬쩍 흘겨보았다.

저 화려한 누각이 누나 원춘의 영화를 나타냄과 동시에 불행을 예고하고
있다니 보옥의 마음이 착잡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다른 곳이라면 몰라도 정전 이름은 내일이 지나도 떠오르지
않을 성 싶었다.

"한나절 동안 걸어다니느라 피곤하고 날이 저물기도 했으니 저쪽으로
돌아나가면서 몇 군데만 더 들러보고 오늘 이름 짓기는 이만 하지요"

가정이 문객들을 돌아보고 그렇게 말하고 나서 가진과 함께 앞장서서
길을 꺾어 돌아나갔다.

한나절 동안에 정문에서부터 여기까지 본 것은 후비 별채 전체의
약 반가량 밖에 되지 않았다.

일행이 얼마 더 나아가니 큼직한 다리가 나타났다.

그 다리는 수문 역할도 하고 있었다.

수문을 몇개 열어놓았는지 다리 밑으로 수정같이 맑은 물이 콸콸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11월 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