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 전대통령이 비자금과 관련 서초동 대검청사에 출두하던 지난 1일은
겨울을 재촉하는 매서운 바람이 몰아쳤고 기온역시 영하를 기록했다.

을씨년스런 날씨가 사람들을 움추러 들게했다.

허지만 노씨의 출두모습을 TV를 통해 지켜본 대부분의 사람들은 몸의
스산함보다는 마음추위로 서글픔마저 느끼는듯 했다.

혹자는 분노를 또 다른 혹자는 배신감과 곤혹스러움을 맛보아야했다.

어느 중소기업자는 비통함마저 느낀다고 토로했다.

"단돈 5천만원이 없어 목숨을 저버리는 기업인도 있는데...".

최근 중소기업인 가운데 부도를 내고 자살하는 기업인이 줄을 잇는다는
보도가 신문지상에 심심찮게 나오고 있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중소기업인의
낮은 탄식이 공허하게 들리지만은 않는다.

전기부품을 생산하는 유창전기금속의 최원식사장(49)은 지난달 18일 서울
세곡동 자신의 셋집에서 손목 동맥을 끊어 자살했다.

지난 5월에는 정호해운의 강태권사장이 7천여만원의 부도를 막지못해 부산
M호텔에서 극약을 마시고 숨졌다.

또 금형업체사장이던 구자성씨는 서울 정릉 청수장부근에서 목을 맸고
조그만 섬유업체를 경영하던 이경식사장은 사업실패를 비관 속초의 한콘도
에서 일가족 4명과 동반 자살을 해 세인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올들어 부도를 내고 이처럼 죽어간 중소기업인이 10여명에 이른다.

특히 유창금속의 최사장은 "단돈 5천만원이 없어 부도를 맞았다"며 "성실
하게 살려고 했으나 세상이 나를 외면했다"는 탄식과 함께 "가족들에게
미안하다"는 유서를 남겼다고 한다.

기업을 일으켜 보겠다는 이들의 의지가 당장돌아오는 몇천만원의 부도를
막지못해 목숨까지 끊어 버린 것이다.

사업자금이 모자라 죽어가는 현실이 있는가하면 저 드높은곳에서 권력과
막강한자리를 이용사복채우기에 바쁜 또 다른 현실을 이들 망자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옳은가.

사실 이번 노태우씨의 비자금사건은 전대미문의 사건이다.

5천억원이라는 비자금을 한나라의 대통령이 조성 개인의 사복을 차리기
위해 온갖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는 것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노씨가 조성했다는 5천억원은 중기인을 죽음으로 몰고가게한 5천만원의
1만배이다.

업체당 부도금액이 5억원이라고 가정하면 노씨비자금은 부도난기업
1천여개를 살릴수있는 엄청난 돈이다.

업체당 종업원수를 20명으로만 계산할 경우 2만명의 근로자들이 생활의
위협을 받지 않아도 되는 액수이다.

더욱이 이들 근로자들의 부양가족과 하청업체 종사자등 경제의 연관관계를
감안한다면 모르긴 몰라도 수십만명에 달할 것이다.

통치를 내세운 엄청난 부패가 우리나라 경제를 흔들고 국가경제의 기반인
중소기업을 죽인 것이다.

노씨가 대기업들로부터 받아냈다는 5천억원은 중소기업들의 몫일수도 있다.

대기업들이 거의 강압적인 분위기에서 이돈을 받치지 않았을 경우 이돈은
산하 협력기업들에 쓰여졌을런지도 모를 것이기 때문이다.

노씨는 아이러니하게도 대통령재임시절 기회있을때마다 경제를 살려야
된다고 역설했다.

6공정부는 "중소기업 경영안정및 구조조정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제정
중소기업의 경쟁력제고에 역점을 뒀다.

많은 중소기업인들로부터 깨어있는 지도자로 박수를 받기도 했다.

어떤 기업가는 이같은 노씨의 일련의 행태를 "지킬박사와 하이드의
양면성"이라고 말했다.

여기에다 중소업자를 더욱 당혹스럽게 하는 것은 비자금이 몰고온 한파이다.

사채시장도 얼어붙고 은행등 금융권은 몸사리기에 바쁘다.

이런상태가 지속될경우 웬만한 중소기업도 버티기가 어려워진다.

중소기업의 긴급운영자금의 사채의존도는 약20%에 달한다.

일부대기업은 성금이니 정경유착의 고리금을 내고 양적 질적성장을 해와
여유가 있지만 근근히 꾸려온 중소기업으서는 닥쳐오는 이 한파가 힘겨울수
밖에 없다.

설상가상으로 최근경기가 3.4분기를 깃점으로 하향커브를 그리기 시작했다.

정부가 발표한 9월중 산업동향을 보면 생산이 11.4%로 상반기의 13.1%보다
떨어지고 있고 소비도 8%에서 6.5%로 줄어들었다.

건축허가면적은 상반기 27.3%에서 9월에는 마이너스 25.0%를 기록했다.

실타래를 풀어야할 경제정책 또한 공백현상을 보이고 있다.

건설업에 대한 지원대책 대금업도입 예산심의등이 뒤로 미뤄지고 있다.

기업은 기업대로 세무조사설 소환설등에 휘말려 투자결정을 뒤로
미루어지고 있는데다가 정부정책결정마저 기약없이 지연돼 경제불안이 가중
되고 있는 것이다.

현재 정치이상으로 심각한 것이 경제이다.

오히려 정경유착과는 거리가 먼 중소기업들이 죽어가고 있다.

중소기업을 이대로 내버려둘 것인가.

(한국경제신문 1995년 11월 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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