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경계론".

한국 반도체 업계에 최근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고 있는 화두다.

대만 반도체 업계가 대대적인 투자에 나서는 것에 대한 우려를 나타내는
말이다.

경계의 방향은 두가지다.

우선 대만 자체가 강력한 경쟁자로 부상할 것이란 점이다.

또 한가지는 미국과 일본의 "이대만제한국"의 견제가 들어올 수 있다는
것.

다시 말해 선진국들이 대만을 이용해 한국 메모리반도체 산업을 위협할
수 있다는 얘기다.

대만의 반도체 분야에 대한 투자계획를 보면 한국 반도체 업계의
경계론이 엄살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대만 반도체 업계가 올들어 발표한 투자규모는 모두 1백27억달러.

국내 업계의 올 투자총액 68억달러보다 배나 많은 액수다.

투자내용도 한국업계로서는 흘려버릴 수 없을 만큼 공격적이다.

오는 97년까지 16메가D램 이상급 메모리반도체 생산량을 지금보다
1백배이상 늘리겠다는 것.

8인치 웨이퍼 월 3천매 가공규모의 현 생산량을 월 31만매로 확대하겠다는
계획이다.

게다가 대만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기술력도 갖고 있다.

대만은 한국에 이어 세계 4위의 반도체 제조국이다.

하지만 질적으로는 우리보다 앞서 있다.

국내업계는 대부문 메모리반도체를 생산한다.

대만은 생산량의 대부분이 ASIC(주문형 반도체)이다.

ASIC은 설계기술이 핵심이다.

기술적인 측면에서 한국보다 나으면 나았지 못할 게 없다.

"기술이라는 옥토를 갖고 있는 대만이 자본이라는 비료를 뿌릴 경우
한국업계로서는 큰 위협이 될 것"(반도체산업협회 김치락부회장)이 분명하다.

대만이 한국반도체 업계의 "세계최고 수성"전략에 걸림돌이 될 것이란
우려에는 선진국들의 "이대만제한국" 가능성도 한 몫 거들고 있다.

미국과 일본의 입장에선 파죽지세로 세계시장을 석권해가는 한국업체가
곱게 보일리 없다.

한국 반도체업계는 반도체의 종주국인 미국이나 한국에 세계최고의 자리를
빼앗긴 일본이나 눈엣가시같은 존재임이 분명하다.

한국 반도체 산업은 이미 미국PC(개인용 반도체)업계를 좌지우지하는
위치에 올라서 있다.

한국업계가 메모리 반도체를 공급하지 않을 경우 미국PC업계는 결정적인
타격을 입게 된다.

미국의 입장에서 한국반도체업계는 상당히 거북한 존재임에 틀림없다.

한국세에 밀려 세계 2위로 떨어진 일본업계로서는 한국의 최대의 적일수
밖에 없다.

그렇지만 지금은 마음대로 견제할 수도 없는 형편이다.

세계 메모리 반도체시장에서 수요초과가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반도체 업계를 건드리면 세계 PC(개인용 컴퓨터)시장이 흔들릴 게
분명하다.

하지만 대만이 메모리 반도체를 본격 공급하면 문제는 달라진다.

대만을 한국의 "대타"로 세울 경우 큰 혼란없이 한국을 견제할 수 있게
된다.

다른 나라를 이용해 상대방을 제압하는 이 방법은 미국이 일본 반도체
산업을 누를때 이미 사용된 전력이 있다.

미국은 지난 86년과 92년 두차례에 걸쳐 일본과 반도체협정을 맺었다.

86년은 일본이 미국 반도체시장에서 70%의 시장점유율을 기록하고 있을
때다.

한창 잘나가던 이때 미국은 일본이 가격경쟁을 하지 못하도록 덜미를
잡았다.

이처럼 일본의 발목을 잡을 수 있었던 데는 이때 미국시장에 본격
상륙하기 시작한 한국산 메모리반도체가 큰 힘이 됐다.

지난 92년엔 덤핑방지와 일본반도체 시장의 총 공급물량중 20%를
수입물량으로 채운다는 협정을 다시 체결했다.

한국이 4메가D램으로 세계시장에서 돌풍을 일으키기 시작한 때다.

국내업계는 우려하는 점은 대만의 등장으로 한국반도체 업계가 "제2의
일본"이 될 지 모른다는 점이다.

한국 메모리반도체 업계는 이제 미국과 일본뿐아니라 대만이라는 강력한
적수를 마주하게 됐다.

이들이 힘을 합해 덤빌지도 모른다.

물론 "아직 크게 걱정할 단계는 아니다"(현대전자 황인석전무).

하지만 국내업체들이 세계 최고라는 달콤한 꿈에만 빠져 있을 경우
대만이라는 깊은 함정에 빠져들지 모른다.

<조주현기자>

(한국경제신문 1995년 10월 3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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