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의 성장을 견인해 온 수출업체들은 이제 새로운 기로에 서있다.

세계 무역기구(WTO)출범은 국제무역구조에서 외형상 국경을 없애버렸다.

또 한편에서는 경제의 블록화도 강화되고 있다.

실질적인 국경의 벽을 높이는 셈이다.

여기에다 후발 개발도상국들의 추격도 만만치 않다.

한마디로 한국 수출업계는 대변신을 요구받고 있는 것이다.

변신의 핵심은 자생력과 경쟁력의 확보다.

사실 한국수출업체는 그동안 정부의 강력한 수출드라이브 정책의 지원을
많이 받았다.

물론 나름대로 매우 힘겨운 길을 개척한 것은 사실이지만 고비마다 정부의
도움이 있었다.

하지만 급변하는 국제 무역환경은 이같은 일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압축에 의한 고도 성장의 길을 달리는 과정에서 허투루 해 온 일들도 적지
않다.

대표적인게 "얼굴없는 수출" 관행이다.

나라 전체의 수출랭킹은 세계 10위권을 넘보면서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수출브랜드를 변변히 갖추고 있지 못한 까닭도 만성적인 OEM(주문자상표부착
생산)수출 관행에 있다는 지적이다.

통상산업부 자료를 보면 한국 수출업계의 자기상표 수출비중(94년 기준)은
51.7%에 지나지 않는다.

품목별 자기상표수출 비중을 보면 사정은 더 딱해진다.

자동차가 55.8%로 절반을 겨우 넘을 뿐 가전제품은 31.4%, 섬유는 8.6%에
지나지 않는다.

한때 세계 최대의 시장점유율을 자랑했던 신발의 자기상표수출 비중은
단 6.2%에 불과하다.

애써 만든 제품을 자기상표로 수출하지 못함에 따라 기업들이 입게 되는
불이익은 한두가지가 아니다.

대표적인 건 제값을 못받는다는 점이다.

OEM수출 가격은 자기상표 수출에 비해 평균 92%선에 그치고 있다.

국내 기업들이 이처럼 기회 손실을 감수하면서까지 OEM체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마케팅 능력불재와 무관하지 않다.

대한상의가 최근 500개 수출업체를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수출상품의
비가격경쟁력 실태"를 보면 그 실태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한국 상품 수준을 3점으로 기준삼아 1점은 매우 낮고 5점은 매우 높다고
평가할 때 <>일본은 3.61점 <>미국은 3.36점 <>유럽은 3.30점으로 나타났다
고 한다.

특히 핵심 비가격경쟁력인 상표인지도에서는 일본이 4.05점, 미국은
3.91점, 유럽은 3.74점으로 평가됐으며 대만도 3.19점으로 한국을 앞선
것으로 조사됐다.

비가격경쟁력이 이처럼 취약하더라도 가격경쟁력에서 확실한 우위를 갖고
있으면 얘기는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사정은 그렇지 않다.

중국 인도네시아 등 후발개도국들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대만 홍콩 같은
주요 경쟁국에 비해서도 한국의 가격경쟁력은 계속 뒷걸음질치고 있다.

무역협회 자료를 보면 한국 수출상품의 평균가격을 100으로 할 때 중국등
후발 개도국들의 가격은 80을 훨씬 밑돌고 있다.

이같은 국제경쟁력 약화는 수출시장 뿐 아니라 국내시장에서도 큰 문제가
되고 있다.

선진국들의 시장개방 압력으로 한국의 수입자유화율은 95년초 현재 99%에
육박하고 있어서다.

수입자유화율이 높다는 것은 국내 기업이 "안방 시장"을 놓고 해당 상품
분야에서 외국 기업과 치열한 경쟁을 벌여야 한다는 얘기와 통한다.

여기에 선진국을 중심으로 한 급속한 기술혁신은 경쟁 조건의 변화를
불러오고 있다.

새로운 기술로 빚어지는 신제품은 새로운 수요를 유발하게 마련이다.

그에 따라 "구기술 제품"은 시장을 잃게 된다.

특히 수요가 개성화 다양화되면서 개별시장은 축소되는 추세다.

이에 따라 다품종 소량생산체제및 개별 시장에 맞는 판매조직이 필요하게
된다.

이는 수요 고급화로 이어지고 그 결과 일류 제품과 일류 기업만이 안정된
생존 기반을 갖게 될 전망이다.

동일한 산업내에서도 사양산업과 첨단산업(섬유류의 경우 특수 섬유)이
동시에 존재하고 산업간에도 <>업무영역의 중복 <>복합산업의 출현 등
새로운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더욱이 첨단 기술산업을 중심으로 상이한 기술의 상호 결합및 통합이
가속화되면서 정보기술산업(컴퓨터기술+통신서비스기술) 자동차산업(전자+
신소재+기계+컴퓨터기술+로봇기술)등이 등장하고 있다.

기술개발면에서는 개인 발명보다는 집단적 연구개발과 협동체제의 국가간.
조직간 긴밀화가 중요시되는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경쟁요소로서 기술의 중요성이 더욱 커짐에 따라 선진국의 기술보호주의는
더욱 강화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요컨대 수출 한국을 둘러싼 세계 무역환경 변화는 한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안개속"이다.

적자생존이란 "정글 법칙"이 보다 확연하게 적용되는 무한 경쟁의 시대로
치닫게 될 것만은 분명하다.

한단계 도약을 위해선 이제까지의 "밀어붙이기 식" 저돌 전략으로만은
안된다는 것도 명약관화다.

자체 기술력을 축적하고 그를 바탕으로 산업구조 조정을 가속화하는등
"재무장"을 서둘지 않으면 안될 상황이다.

"수출 1,000억달러 돌파"는 이런 한국 수출업체들에 가일층의 도약을 격려
하는 하나의 이정표일 뿐이다.

< 이학영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5년 10월 2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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