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일제 식민통치의 질곡으로부터 "대한민국"이 홀로 선지 50년째가
되는 해.

그러기에 1,000억달러를 돌파한 의미는 더욱 깊다.

한없이 아득하게만 여겨졌던 "벽"이었기에 더욱 그렇다.

앞으로 달려야할 길이 훨씬 더 많이 남아 있고, 넘고 건너야할 산과 골도
불지기수임엔 틀림없다.

그러나 첫 출발때의 모진 어려움을 되돌아보면 어떤 난관도 "돌관 불능"일
수는 없다.

특히 50년전 해방직후의 상황을 보면.

지난 46년1월.

한반도 남쪽을 "통치"하고 있던 미군정청은 법령 제39호로 "대외무역
규칙"을 선포한다.

당국의 허가없이는 일절 대외무역을 할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48년8월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한국 경제의 골격이 짜여지기 시작했다.

이 해의 주종 수출품목은 마른오징어 김 한천등 3대상품.

그나마 규모는 보잘것 없었다.

사실 45년부터 60년에 이르는 기간은 "무역정책 불재"의 상황이나 다름
없었다.

"수출 한국호"가 본격 발진을 시작한 것은 61년들어서였다.

"5.16"군사쿠데타로 들어선 박정희정권은 수출드라이브 정책을 기치로
내걸고 수출진흥, 수입억제, 밀수방지를 강력하게 밀어붙였다.

해가 바뀌어 62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시작되면서 수출드라이브정책은 한층 탄력을
받게 된다.

수출진흥을 위한 여러 법령이 제정되면서 무역금융등 각종 수출지원 수단이
본격 등장한다.

60년 3,300만달러였던 연간 수출규모는 63년엔 8,600만달러로 껑충 뛰어
오른다.

수출 한국호의 첫 이정표가 된 "1억달러수출 돌파"는 이런 상황속에서
찾아왔다.

64년이었다.

정확히는 이해 11월30일.

이해들어 수출진흥 종합시책이 본격 수립.운영되기 시작했기에 그 의미는
더욱 깊었다.

그러나 65년3월.

수출드라이브 가도에 첫 변수가 등장한다.

원화환율에 대한 단일변동 환율제도가 실시된것.

정부는 이에따라 수출장려 보조금제도와 수출입실적 링크제도 같은 직접
지원정책을 지양하는 대신 간접적인 수출증진 정책을 확대 실시하기 시작
한다.

수출용 원자재수입에 대한 마진세를 철폐하고 수출금융 금리를 국제수준
으로 인하하는 등으로.

67년 한국은 GATT(관세무역일반협정)에 가입한다.

국제적인 무역국가로서의 권리와 함께 수출입관련 제도의 투명성 확보등
각종 "대외 의무"도 함께 지게 된다.

69년이후 정부는 그때까지의 양적인 수출확대 정책을 질적인 수출진흥
정책으로 전환한다.

순풍은 계속돼 70년에는 10억달러 고지를 넘어선다.

그러나 호사가 많으면 다마가 찾아온다던가.

70년대는 세계경제가 장기 불황국면으로 빠져드는 전환기를 열면서 시작
된다.

71년 미국의 금태환 정지조치에 따른 브레튼우즈 체제의 붕괴와 "1차 오일
쇼크"가 세계경제를 강타한것.

그 파장은 곧장 한국을 뒤흔든다.

경기침체.인플레.국제수지악화의 3중고로 극심한 몸살이 찾아온다.

해외 경제여건이 악화되면서 수출증가율이 73년의 98.6%에서 이듬해(74년)
엔 38.3%, 75년에는 60년대이래 최저 수준인 13.9%로 뚝 떨어진다.

정권적 위기를 "10월 유신"으로 돌파한 박정희정권은 "100억달러 수출,
1,000달러 소득"을 새로운 구호로 내걸고 나라경제를 신수출드라이브 체제로
몰고 간다.

오일달러로 졸부를 주체키 힘들게된 중동의 아랍산유국들을 주타깃으로
삼아 건설및 장비수출을 본격 추진한다.

공산화(74년)이전 월남에 대한 막바지 수출특수도 70년대 초반의 위기상황
을 극복하는데 일조한다.

대망의 "100억달러 수출"이 달성된 것은 77년12월21일.

박대통령은 이날에 맞춰 "수출의 날" 기념식을 성대하게 열고는 "자립경제
를 달성하기 위한 또 하나의 출발점"이라고 "주마"에 "가편"한다.

정부는 이에 발맞춰 수출산업 구조를 경공업에서 중화학공업 중심으로
재편하는 작업을 가속화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10.26"의 돌연한 총성으로 상황은 다시 반전된다.

박정권이 종말을 고하면서 찾아든 정치적 혼란에다가 제2차 오일쇼크까지
겹치면서 경제에 또 한차례의 시련을 겪게된 것.

그러나 궂은 날이 있으면 맑은 날도 있다고 뒤이어 "3저 호재"가 찾아든다.

"단군이래 최대 호황"이란 말까지 나오면서 80년대후반 수출 한국호는
승승장구를 거듭해 "무역 흑자국"으로의 변신에 성공한다.

86년 31억달러의 흑자를 낸것.

89년엔 흑자규모를 89억달러로까지 불린다.

무대는 여기서 90년대로 넘어와 오늘에 이른다.

선진국 진입을 위한 시련인가.

이때부터 수출 한국호는 전에 없이 거센 풍랑을 만나기 시작한다.

여기저기서 반덤핑제소와 시장개방압력이 들어온다.

특히 86년 우루과이의 푼타 델 에스테에서 시작돼 작년말 극적으로 타결된
우루과이라운드(UR)협상은 한국시장에 거의 전면적인 개방을 몰고 왔다.

3저 약효가 사라진 90년이후 무역수지가 다시 적자로 돌아선 와중에서
당하게된 전면 개방의 회오리는 이제 한국 기업들로 하여금 해외에서만이
아니라 안방시장에서도 외국업체와의 치열한 판매경쟁을 불가피한 상황으로
몰고 왔다.

"1,000억달러 고지"의 돌파는 수출 한국호에 새로운 전열 정비를 독려하는
하나의 조그마한 이정표일 뿐이다.

< 이학영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5년 10월 28일자).

ⓒ 한경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