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에서는 태조때 개국공신부터 영조때 구무공신에 이르기까지
모두 28종의 명칭으로 939명이 공신으로 봉해졌다.

이들은 4등급으로 분류돼 작위와 토지,노비를 받았으며 자손들은
과거를 보지 않고도 벼슬을 하는 특전도 누렸다.

공신으로 봉해지면 이들은 군왕과 함께 경복궁 북쪽에 마련돼있는
맹단에 나아가서 공신회맹제를 올렸다.

이때 왕은 충성을 맹서하는 아들 앞에서 "죄가 종사에 관게되지
않는한 용서하기를 영세에 미치도록 하겠다"는 언약을 한다.

공신은 물론 그 후손들에게까지 모반죄를 짓지 않는한 모든 죄를
용서하고 결코 죽이지는 않겠다는 보장을 받는 셈이다.

그러나 국가의 창업.중흥.난세수습에 공이컸던 공신들이라고 해서
충신만 있었던것도 아니었고 그들의 후손들은 날이 갈수록 범법작 많아져
역대왕들은 그들때문에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

고령군 신숙주의 넷째아들인 신정도 성종을 이런 곤경에 빠뜨렸던
인물중의 하나다.

도승지 이조참판을 거쳐 평안감사까지 지내던 신정이 수종3명의 임명장을
위조한 사건이 발각됐다.

그는 수종들이 한짓이라고 완강하게 부인했지만 수사결과 손수 문안을
쓰고 병조의 관인과 병조당상관의수결까지 위조해 임명장을 만들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당시 법전인 "경국대전"에는 인신위조한 자는 중죄로 다스려 참형에
처하고 그 처자는 여러 읍의 노비로 영속시키도록 돼 있었다.

원훈의 아들이자 장본인이 공신이고 그의 장모가 종친인 후령군의
아내였기 때문에 성종의 고뇌는 더 컸다.

조정의 여론은 "공신을 죽여서는 안된다"는 쪽으로 기울고 있었지만
성종은 어려운 결단을 내려 이렇게 판결했다.

"공신의 반열에 있었으므로 차마 참수할수는 없으므로 특별히 사사하고
공신적에서 삭제하며 그 자손은 과거를 보지 못하도록 금고한다" 그때
성종이 내린 판결이유가 자못 인상적이다.

"한번도 심한데 자기죄를 속이는 것을 어찌 세번씩이나 할수 있단
말인가.

죄에 비하면 공이 죄를 덮기에 부족하다.

법이란 것은 만세에 떳떳한 것이고 용서란 것은 한때의 은전이니 어찌
한때의 은전으로 만세의 떳떳함을 폐할수 있겠는가" 조선왕조가 500년을
이어올수 있었던 것은 성역없이 죄인은 물론 그 자손까지 벼슬하지 못하게
했던 엄격한 법의 집행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이야기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10월 2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