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란 세월이 지나가면 어둠속에 묻쳐 정적이 되어 버린다.

그것이 바로 역사의 실체다.

역사의 정적을 후세에 전해 주는 주요한 수단은 서책이나 판, 비석에
문자로 새겨 놓은 기록이다.

그것이 역사의 진실과 허위,확실과 불확실을 가능하게 해 준다.

고대페르시아의 설형문자와 고대이집트의 상형문자는 2000여년전인
고대로마시대에 그 뜻을 파악할수 없게 되는 길로 들어 섰다.

그것들은 각기 2000년과 3000년이라는 오랜 사용역사를 지녔었는데도
고대로마제국의 팽창과 더불어 실종된 문자가 되어 버렸던 것이다.

그뒤 그 문자들은 고대인들이 명각한 신기한 흔적이나 장식표지 같은
것으로 생각되었을 뿐이다.

그 문자들이 역사의 전면에 다시 등장하게 된 것은 그것들이 뜻을 지닌
문자라는 사실을 규명할수 있는 명문들이 발견되면서 부터다.

17세기의 페르시아주재 스페인대사가 고대앗시리아 수도 칼후(이라크의
님루드)에 있는 아슈르나 시르팔2세 궁전의 양각 벽화 명문을 발견해 내지
못했거나 1799년 나폴레옹원정군의 한 사관이 알렉산드리아부로 나일강하구
마을에서 로제타석을 발굴해 내지 못했더라면 그 베일을 벗겨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묻혔던 역사의 어둠을 밝혀내는데 명문의 중요성이 얼마나 큰가를 말해
주는 선례들이다.

지난 1971년 공주 금성동 고분발굴에서는 무녕황과 왕비의 묘라는 사실
묘의 축조연대를 밝혀주는 명만지석이 삼국시대고분발굴사상 처음으로 나와
그당시 백제문화의 일설을 가늠하게 해 주는게 큰 기여를 한바 있다.

이번에는 부여읍 능산리 절터에서 무녕황의 손자인 창왕 위덕왕)13년에
공주 <>이 바쳤다고 되어 있는 명문이 새겨진 사리함이 출토되어 화제다.

위럭왕의 태자때 이름은 창이다.

그는 태자로 있을 때 부왕인 명문왕을 도와 신라정벌에 앞장 섰다.

성왕이 전사하여 유해조차 신라군에 빼앗기는 수모를 겪었던 관산성(충북
옥천)전투때는 선봉장으로 싸웠다.

왕위에 오른 창은 귀족들의 패전책임추궁으로 곤경에 처하기도 했으나
재위 44년동안을 신라와 고구려에 대한 적대정책으로 일관했다.

부왕의 설원을 위해 번번히 신라국경을 침범했고 중국의 남북조 수나라
등과 외교관계를 다지면서 고구려를 견제했다.

이번 발굴된 신리함이 위덕왕의 여동생이 부왕의 명복을 빌고자 받친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 것이긴 하지만 위덕왕대의 연대를 확인시켜 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는 점에서 그 사료적 가치는 크다 하겠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10월 2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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