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응찬 신한은행장은 금융계에선 좀 독특한 인물이다.

학연을 유난히 중시하는 금융계풍토에서 고졸출신으론 이례적으로
행장까지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라는 점도 그렇지만 금융인으로서의
탁월한 능력과 친화력이 돋보인다는 점에서다.

금융계에선 나행장이 6공핵심에서 노태우전대통령의 비자금관리를
맡긴 것도 그만큼 나행장의 능력을 높이 샀기때문이란는 역설적인
설명을 할 정도다.

경북 상주출신으로 59년 선린상고를 졸업한 나행장은 농협의 전신인
농업은행에 은행생활을 시작한뒤 68년 대구은행으로 옮긴다.

이때 만난 김준성행장(부총리겸 경제기획원장관을 지냈으며 현재
이수화학회장)은 나행장의 금융계의 "선생님"과 같은 영향을 줬다.

그는 나행장에게 "은행경영에서 상업성이 중요하다는 점과 객관적인
인사관리가 절대적으로 요구된다는 점"을 가르켰고 나행장은 이를
끝까지 실천했다.

나행장은 김행장밑에서 비서실장을 지낸뒤 대구 원대동지점장으로
자리를 옮기는데 이때 인생의 커다란 전기가 마련된다.

그 계기는 바로 재일교포인 이희건(현 신한은행회장)과의 만남.

김준성씨의 소개로 만난 이회장은 당시 일본 대판신용조합회장으로
본국투자를 구체적으로 생각하고 있을때였다.

나행장은 이때 이회장등 재일교포자금을 관리해주면서 탁월한 업무
능력을 인정받아 이회장이 77년 제일투자금융을 세울때 "이사"로
발탁, 이회장맨이 되었다.

제일투자금융을 설립한 이회장은 당시 전두환대통령의 정치자금을
조달하면서 금융계의 황제로 군림했던 이원조씨와 가까운 관계를
쌓았고 비슷한 시기인 82년 신한은행을 설립했다.

이회장과 가까운 관계인 이씨는 신한은행의 보이지않는 후견인 이었다는
점은 금융가에선 잘 알려진 얘기다.

86년 나행장이 상무로 있고 이씨가 은행감독원장으로 있을때 당시
청와대에서 신한은행의 모부장을 임원으로 승진시키라는 "압력"이
들어왔으나 이원장이 신한은행의 손을 들어줘 청와대의 인사청탁을
물리쳤다는 것은 금융계의 유명한 일화중 하나다.

이처럼 나행장은 대출이나 인사청탁을 거부하는 행장으로 유명했다.

나행장의 "선생님"격인 김준성씨가 한 외지와의 인터뷰에서 "내가
인사청탁을 해도 들어주지 않았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이용만행장시절 상무였던 나행장은 전무(88년)를 거쳐 은행장(91년)으로
올라서면서 신한은행을 후발은행이라는 핸디캡을 딛고 일류은행으로
만들었다.

행내에선 나행장 스스로가 "신한정신"과 "신한문화"를 대변하는 본보기
였고 항상 필요한 자리에서 필요한 역할을 해온 성실한 리더였다는
평을 하고 있다.

따라서 행내에서는 "나응찬"이후의 대안부재를 걱정할 만큼 그에게
무게가 실려있다.

현행 국내은행들의 관행처럼 굳어진 "3년임불가"원칙으로 97년초
임기만료로 물러날 경우 실직적인 파워를 가진 "부회장"으로 갈 것이란
견해가 압도적인 것도 사실이었다.

이번에 나행장의 말들 듣고 이우근 당시서소문지점장(현이사대우융자
지원부장)에게 차명계좌개설을 지시한 홍영후 당시상무(현신한리스사장)도
나행장과 비슷한 인생역정을 갖고 있다.

경북고출신의 홍사장은 대구은행시절부터 나행장과 절친한 관계로
"경력"도 나행장과 비슷해 제2의 나응찬이란 말을 들었다.

나행장이 제일투자금융을 거쳐 신한은행으로 갔을때 곧바로 신한은행
대구지점장으로 합류했다.

그뒤 이사 상무를 거쳐 현재 계열사인 신한리스사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신한은행의 업무행태는 개인적인 관계보다는 업무능력을 우선하는
스타일이다.

나행장으로부터 차명계좌개설을 지시받은 홍상무가 서소문지점을
택한 것도 이지점장(청주고 고려대출신으로 행장이나 상무와 지연
학연관계가 없음)이 당시 지점장들 중에서 가장 유망한 것으로
평가되었기 때문이란게 은행관계자들의 얘기이기도 하다.

어쨋든 나행장은 이제 심판대에 올랐다.

실정법을 어겼기때문이 아니라 전대통령의 정치자금을 관리했다는
"95년 10월"을 기준으로 한 도덕적 심판대다.

"그 당시 그 입장에 있었다면 누군들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는게
대부분 금융인들의 생각이다.

그러나 심판이 어떻게 내려질지는 아직 누구도 말하기 힘든 상황이다.

< 육동인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5년 10월 2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