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옥이 지은 정자 이름을 듣고 문객들은 감탄의 기색이 역력하였으나
아버지 가정은 일부러 그러는지 엄지와 검지로 수염을 비틀면서 덤덤한
표정을 짓고만 있었다.

그러다가 다시 보옥을 돌아보며 말했다.

"편액에 적어 넣기 위해 이름 두 자 짓는 것 쯤이야 쉽겠지만 대련은
그렇지 않을걸. 어디 한번 칠언절구로 대련을 지어보려무나"

가정은 어떡해서든지 보옥을 곤란한 지경으로 몰아넣으려고만 하였다.

보옥은 정자의 풍광에 걸맞는 대련을 짓기 위해 정자에서 사방을
둘러보며 느린 걸음으로 왔다 갔다 하였다.

드디어 시상이 떠올라 입을 열어 칠언절구의 대련을 크게 소리내어
읊었다.

둑 위에 휘늘어진 버들가지 연못물을 더욱 푸르게 하고 언덕 너머
꽃밭에서는 한줄기 꽃향기 흘러오누나 보옥의 시를 들은 가정은 자기도
모르게 그만 얼굴에 미소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가정이 아들 보옥의 글재주에 처음으로 칭찬의 반응을 보인 셈이었다.

문객들도 보옥의 시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자, 이제 다른 곳으로 가봅시다"

가정의 말에 정자를 나온 일행은 연못을 건너 주변의 풍경들을 유심히
살피며 천천히 걸어나갔다.

얼마 후에 길게 뻗은 흰 담장이 눈에 들어왔다.

그 담장 안에는 몇 채의 아담한 집들이 들어서 있었는데, 그 집들은
수천 수백 그루의 푸른 대나무 숲에 둘러싸여 있었다.

"아, 정말 멋들어진 집이로군"

일행이 감탄을 하며 대문을 들어섰다.

섬돌 아래 통로에는 자갈돌이 가득 깔려 있었다.

그 자갈길을 따라 걸으며 둘러보니 우선 구불구불 안으로 뻗은 회랑이
눈에 들어왔다.

저 앞쪽에는 세칸짜리 집 한채가 서 있었다.

한칸은 사이벽을 막아 어둡고 두칸은 통방으로 연결되어 훤한 편이었다.

방마다 크기에 알맞게 침대며 책상, 의자들이 놓여 있었다.

안방 뒷문을 열고 나가니 곧장 뒤뜰이 펼쳐졌다.

그 뜰에는 큰 배나무와 잎이 넓은 파초들이 심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 뜰이 끝나는 지점에 두칸짜리 집 한채가 따로 서 있었다.

뒤뜰 담장 밑으로 뚫린 큰 구멍으로는 맑은 시냇물이 흘러들어와
한자 정도 되는 도랑을 따라 집 건물 전체를 에돌다가 앞뜰에 이르러
다시 대나무 숲 쪽으로 빠져나갔다.

얼마나 정교하게 그 모든 것이 배치되고 연결되어 있는지 가정은
벌어진 입을 다물 줄 몰랐다.

문객들도 상기된 표정으로 집 구석구석을 둘러보기에 여념이 없었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10월 23일자).